철우(가명)씨는 중견기업에서 30년 가까이 기술직으로 일하고 있다. 5년 뒤면 정년으로 회사를 떠난다. 군대 제대하고 들어온 회사가 평생직장이 됐다. 최근 몇 년간 정년퇴직자가 많아 신입사원이 많이 들어왔다.
철우씨 신입사원 시절에는 회사가 군대와 비슷했다. 선배보다 늦게 왔다고 안전화로 까고, 기계 정비를 가르치면서 안전모로 머리통을 후려치기도 했다. 선배 입에 ‘씨발’이 후렴구처럼 붙어다녔고, ‘병신새끼’ ‘또라이’는 욕도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거의 매일 술시중을 들어야 했다. 2차·3차는 당연했고, 토해가며 술을 배워야 했다.
세월이 흘러 폭행은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폭언을 하며 엄하게 일을 가르치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입사원 때 제대로 일을 배워야 동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올해 입사한 부서 막내에게 기계 정비법을 가르쳤다. 일에 대한 책임감이 떨어져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던 막내였다. 교육하는데 한 귀로 흘려듣는 것 같았다. 철우씨는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질렀다. “야, 씨발, 그 정도는 알아들어야지! 기본적인 것도 몰라?”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교육했다.
대기업은 갑질 줄었으나 중소기업은 되레 늘어며칠 후, 회사 인사과에서 연락이 왔다. 부서 막내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철우씨를 신고했다는 것이다. 철우씨는 기가 막혔다. 일을 가르쳤는데 직장 내 괴롭힘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딱 한 번의 욕도 괴롭힘이 될 수 있냐고 항변했다. 막내는 업무를 가르칠 때마다 억압적인 태도로 모욕을 느끼게 했기에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주장했다.
직장갑질119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100일을 맞아 19~55살 직장인 1천 명에게 10월8일부터 15일까지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2019년 직장갑질지수는 30.5점으로 2018년 35.0점보다 4.5점 줄었다. 2018년 조사와 비교해 갑질이 가장 많이 줄어든 문항은 ①다른 사람들 앞이나 온라인상에서 모욕감을 주는 언행을 한다(42.0점→29.9점, ↓12.1점) ②회사에서 원하지 않는 회식문화(음주, 노래방 등)를 강요한다(40.2점→30.3점, ↓9.9점) ③상사가 업무를 지시하면서 위협적인 말이나 폭언, 협박을 한다(33.8점→23.6점, ↓10.2점) 순이었다.
반면 2018년과 비교해 갑질이 거의 줄지 않은 문항도 있다. ①휴게공간 없음(44.0점→43.8점, ↓0.2점) ②뒷담화(29.2점→28.7점, ↓0.5점) ③시간외수당(45.9점→45.0점, ↓0.9점) 순이었다. 직장갑질 문제가 사회적 관심 사항이 되고 법안이 시행되면서 모욕·회식강요·폭언·성희롱 등은 상당히 줄었지만, 돈과 직접 관련 있는 임금체불, 휴식공간, 채용 사기, 연차휴가, 근로조건 불이익 변경 등은 여전히 문제가 심각했다.
사업장 규모별로 봤을 때 공공기관은 35.6점에서 26.0점으로 9.6점이나 줄었고, 민간 대기업도 37.5점에서 30.6점으로 6.9점 줄었다. 반면 민간 중소영세기업은 28.4점에서 31.4점으로 3.0점 올랐다. 직장갑질 예방 교육은 공공기관(59.7%), 국내 대기업(46.4%), 국내 중견기업(32.3%), 국내 중소기업(22.2%), 영세개인사업자(10.1%) 순이었다. 갑질 예방 교육을 받은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 갑질지수가 많이 줄었다.
직장갑질119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직전인 2019년 6월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갑질금지법이 7월16일 시행되는 것을 안다’는 응답이 33.4%였는데, 4개월 뒤인 10월 조사에서는 알고 있다는 응답이 72.2%로, 법 시행 인지도가 두 배 이상 늘었다.
‘법 시행 뒤 직장 내 괴롭힘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응답이 39.2%였고 변화 없다는 60.8%였다. 직장인 10명 중 4명이 직장갑질이 줄었다고 답한 것은 법 시행의 의미가 적지 않음을 방증한다. 직장갑질이 줄었다는 응답을 직장 유형별로 보면 행정 부처와 지자체(48.7%), 공공기관(49.3%), 국내 대기업(38.6%), 국내 중견기업(36.7%), 국내 중소기업(35.1%), 영세개인사업자(34.5%) 순이었다. 직업별로는 사무직(40.8%)이 생산직(35.3%)이나 서비스직(35.8%)보다 높게 나타났다.
갑질이 줄었다는 응답 결과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갑질의 행위자일 가능성이 높은 50~55살이 50.0%로 갑질 경험이 가장 높은 30대(32.8%)보다 무려 17.2% 높았다. 또 상위 관리자급(53.6%)이 일반 사원급(37.0%)보다 16.6% 높았다. 갑질 가해자인 관리자와 50대는 갑질이 줄었다고 생각하고, 갑질 피해자인 30대와 평사원은 상대적으로 갑질이 줄지 않았다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50대와 관리자는 1980년대 학교와 군대를 다니고 1990년대 직장에 들어간 세대다. 군사독재 30년의 결과로 학교와 직장도 병영처럼 폭력적, 위계적, 수직적 방식으로 운영됐다. “까라면 까라”는 상명하복으로 회사 업무를 배웠다. 직장 내에서 성희롱·성추행이 버젓이 벌어졌고, 폭행과 폭언은 일상이었다. 휴가를 마음대로 쓰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사는 인생의 전부였다. 직장문화가 조금씩 나아졌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그렇게 20대는 50대가 됐고, 평사원이 관리자로 승진했다. 30년이 흘렀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교육이 됐고, ‘미투운동’이 벌어졌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다.
직장갑질119가 6월 직장인 1천 명에게 직장갑질 실태와 감수성을 조사한 결과, 20대와 50대가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결과는 ‘성희롱이나 직장 괴롭힘으로 오해받을까봐 부하 직원에게 말을 붙이는 것도 어려워졌다’(16.9점)였다. 같은 질문에 상위 관리자와 일반사원의 점수 차가 11.1점으로 높았다.
20대와 50대의 감수성 차이가 큰 항목으로 ‘팀워크 향상을 위한 회식이나 노래방 등은 조직문화를 위해 필요하다’(11.7점), ‘휴일에 단합을 위한 체육대회나 MT 같은 행사를 할 수 있다’(11.0점), ‘회식이나 단합대회에서 분위기를 띄우려면 직원들의 공연이나 장기자랑이 있어야 한다’(10.1점) 순이었다. 50대는 새벽부터 출근해 목숨 바쳐 일하고, 퇴근 뒤 술집과 노래방에서 놀고, 회사 단합을 위해 휴일에 MT나 체육대회를 하고, 심지어 명절에도 출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20대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직장갑질 예방을 위해 세대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갑질 감수성 키우려면갑질 감수성이 낮게 나온 항목을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성희롱이나 직장 괴롭힘으로 오해받을까봐 부하 직원에게 말을 붙이는 것도 어려워졌다. → 성희롱, 괴롭힘으로 오해받을 말을 그동안 너무 함부로 한 건 아닐까?
상사가 시킨 일은 불합리하게 느껴져도 일단 해야 한다. → 불합리한 지시는 상사와 상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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