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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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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 피해자 해고가 우수 기업?

사수는 툭하면 욕하고 모욕적인 말로 멸시

회사에 신고했지만 신입 중 홀로 계약 해지
등록 2019-08-06 19:40 수정 2020-05-03 04:29
경기도 수원시 고용노동부 경기지청 민원실에 마련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에서 민원인들이 상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도 수원시 고용노동부 경기지청 민원실에 마련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에서 민원인들이 상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성화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태연(가명)씨는 S그룹 공채에 합격해 S중공업에서 5년 동안 품질검사 업무를 했다. 조선업 경기 불황으로 많은 하청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지만, 정규직인 태연씨는 실직을 걱정하지 않고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섬 거제의 생활은 외로웠다. 고향이 그리웠다. 지난해 초 친척이 많이 사는 전라도의 대기업에서 생산기술직 채용 공고가 났다. 그는 입사원서를 냈고 합격했다. 함께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3개월 동안 직무공통교육을 받고 9개월간 현장 부서에 배치돼 일한 후 부서 상급자의 평가를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방식이었다.

다른 직원들까지 폭언에 가세

태연씨는 직무공통교육이 끝나고 생산시설 운전 업무에 배치됐다. 쇳물을 끓이고 옮기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많은 업무를 기계로 했고 매뉴얼이 있어 선배들이 알려주는 대로 하면 업무를 익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복잡한 기계 조작 업무도 3년 정도 배우면 능숙해질 수 있다고 했다.

회사 분위기는 마치 군대처럼 험악했다. 선배들은 반말과 하대가 기본이었고, 강압적인 어투로 일을 가르쳤다. 위험한 업무가 많은 제철소, 먼저 입사한 신입사원이 쇳물을 쏟는 실수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태연씨는 신입사원답게 긴장하고 일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각이나 조퇴 없이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런데 태연씨의 사수를 맡은 주임은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아, 시발 존나 짜증 나네. 야, 니는 시발, 일을 할 거면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냐. 왜 한 가지 일을 두 번 세 번 하게 만드냐, 병신같이.” 기계가 잘 작동하려면 어디를 봐야 하냐고 물어서 화면을 잘 주시해야 한다고 답하자, 주임은 “참내 지랄하네, ○번 카메라를 잘 봐야 랜스(산소를 불어넣는 설비)가 들어가는지 확인할 거 아니야?” 하고 소리쳤다.

주임의 폭언은 줄어들지 않았다. 목덜미를 짓누르며 발로 걷어차려다 멈추고, 따귀를 때리는 척하면서 위협했다. 태연씨를 밀치며 욕했다. “야, 이 새끼야! 쳐나와! 뭐하는 새끼야. 니는 뭐하는 새끼야! 아직도 이것도 할 줄 모르냐. 이걸 아직도 못한다는 건 대가리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 돌대가리이거나.”

군대를 빼닮은 강압적인 조직문화가 부서에 음습하게 스며들었다. 주임만이 아니라 사원들도 폭언과 멸시에 가담했다. 한 사원은 태연씨를 향해 “야 시발, 안 뛰어가고 뭐하냐. 니 또 딴생각했지? 하, 시발”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원은 가래침을 뱉으면서 목살을 꼬집고 머릿속에 생각이 있냐고 비난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느냐고, 군대는 갔다온 게 맞냐고, 목소리가 왜 이렇게 개미 새끼만 하냐고 소리쳤다. 근무 중 휴대전화를 걷어가서 이런 폭언은 녹음하지는 못했고, 노트에 기록했다.

부서에 배치된 지 두 달, 출근 전날 밤이면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청할 수 없었던 태연씨는 수면유도제를 복용해 간신히 잠이 들곤 했다. 방음이 잘되지 않는 낡은 회사 기숙사 때문인가 싶어 돈을 주고 원룸에서 살기 시작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수면유도제도 잘 듣지 않았다.

수차례 따귀 맞은 동료는 9개월 만에 퇴사

태연씨는 선배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고 눈물을 흘린 사원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부서에서 도는 이야기는 폭행 가해자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를 ‘눈물이나 흘리는 남자 같지도 않은 남자’로 비아냥거리는 분위기였다. 수차례 따귀를 맞은 피해자는 결국 9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같은 부서에서 신입사원 11명 중 6명이 단체로 사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만둔 직원이 인터넷카페 ‘독취사’(독하게 취업하는 사람들)에 ‘7개월 근무 후 퇴사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폭력적인 조직문화를 고발하기도 했다.

스트레스는 불면증, 우울증, 적응장애, 공황장애로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태연씨는 부서 내 상급자인 파트장을 찾아가 부서 변경을 요청했다. 하지만 파트장은 부서를 바꿔주지 않았다.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란 태연씨는 주임을 찾아가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다. 주임이 음성파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태연씨는 폭언을 기록해놓았다고 말했다. 해병대에서 폭행한 병사가 그 행위를 녹음한 것이 없었는데 노트에 적어놓은 걸로 헌병대가 조사해 폭행 병사를 영창에 보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다음날 공장에서 태연씨가 해병대에서 선임들을 때려 영창에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따돌렸다.

태연씨는 마지막으로 공장장을 찾아가 폭언 사실을 공개하고 부서 변경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장장은 부서 이동을 원하는 사람이 많고, 주임이 태연씨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길들이려고 그러는 것이니 참으라고 했다. 태연씨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를 찾아가 폭언 노트를 보여주고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 그런데 신고센터가 비밀 보장을 하지 않아 부서에 소문이 퍼졌다. 태연씨가 출근하자 선배 사원은 “어딜 그렇게 들쑤시고 다니냐, 죽여버린다”고 협박했고, 주임은 그를 업무에서 배제해 12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했다.

회사는 1년이 되기 직전 태연씨와 계약을 해지했다. 스스로 그만둔 직원을 제외하고 ‘일학습근로자’로 계약한 79명은 모두 정규직이 됐다.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신입도 높은 점수를 받아 정규직이 됐고, 쇳물을 쏟아 생산이 중단된 인턴도 정규직으로 전환됐는데, 태연씨만 제외됐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을 앞두던 지난 3월, 태연씨는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법이 조금만 더 일찍 시행됐더라면 태연씨는 어떻게 됐을까?

고통 속에 신고했으나 끝내 버려진

정부가 2월 발행한 에 이 기업은 ‘직장 내 괴롭힘 대응 우수 기업 사례’로 소개됐다. 예방 활동으로 신년 최고경영자(CEO) 메시지를 통해 윤리경영을 강조하고, 전 임직원이 온라인상으로 윤리규범을 읽고 직접 성명을 기입하는 서약을 했다. 예방지침을 제정·시행하고, 전 직원에게 예방교육을 하고, 소속 직원을 넘어 그룹사와 외주사까지 괴롭힘 설문조사를 한다. 회사 누리집에 직장 괴롭힘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신고·제보자의 신분 노출이 가능한 모든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시 징계할 수 있도록 명문화한다고 했다. 감사조직인 정도경영실의 임직원은 연 2회 ‘신고자 신분 보호 서약식’을 한다고 했다. ‘직장 내 괴롭힘 대응 우수 기업’에서 태연씨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다가 신고했으나 신분을 보호받지 못했고, 끝내 버림받았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우리 사회의 못난 갑질은 이제 세계적 수치가 됐다”며 “갑질은 그 갑이 이끄는 조직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조직 운영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태연씨가 당한 직장갑질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지 이낙연 총리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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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직장갑질119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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