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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야, 괜찮아

잃었다고 생각하는 모두에게 위로를
등록 2018-12-22 14:58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강의하는 대학의 학생들에게 낸 과제를 읽고 있다. 3대 가족사. 할머니 세대와 만나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글이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아픈 역사나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재가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학생들이 있었다.

“독해져야지” 되뇌었던 할머니…

“할머니가 생선을 팔면서 아버지와 작은고모를 먹여살리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를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났다. 이 부분에서는 서로 눈을 마주치치 않으며 인터뷰를 이어갔고, 한번에 인터뷰를 마칠 수가 없었다”는 학생. 지금은 직장인인 아버지의 꿈이 이윤을 거의 남기지 않으면서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한 봉지 주워오면 커피를 준다든지, 예쁜 물고기를 반값에 준다든지 하는 마음으로 바닷가 가게를 운영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학생도 있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인 ‘두 사람의 인생’을 쓴 1학년 복학생. 군대 가기 전 1년 남짓 홀로 사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는 그의 글은 굴곡진 긴 인생사였다. 1933년생 셋째 딸로 태어나 제주4·3을 피해 열다섯 간호사 작은언니 따라 서울행. 한국전쟁에 휘말린 작은언니는 군병원에 있다가 폭격 맞아 행불. 할머니는 홀로 피란지 부산 국제시장까지 걸어가 일하다 겨우 고향과 소식이 닿아 귀향한다. 4·3으로 가족 잃은 울분에 술로 하루를 보내던 남편과는 10년 만에 작별. 졸지에 삼 남매의 가장이 된 할머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온갖 노동을 하며 이렇게 되뇌었다고 했다. “독해져사주(독해져야지).”

그런데도 홀로 사는 외로운 노인에게 전화 한 통 자주 하지 못했고, 평생의 소원이 따뜻한 가정 꾸리고 싶었던 아버지를 말로써 상처를 입혔다는 아픈 소회도 뱉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외롭지 않도록 옆에 있어주는 것. 평생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귀한 마음이었다.

학기를 마치며 그 학생에게 할머니 안부를 물었다. 병중의 할머니는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떴다 했다. 그의 말처럼 헤어짐은 슬프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추억 속에 영원하다는 말도 떠올랐다. 갓 스물의 학생들은 생각보다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깊고 명료했다.

아버지의 광주항쟁 경험을 처음 들었다는 이주민 학생. “리스크 없는 인생은 없다”는 일본 혼다 게이스케 축구선수의 말을 좋아한다는 한국 어머니와 일본 아버지를 둔 일본 유학생. “갑자기 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서울로 쓴 수시 원서가 줄줄이 불합격이 되는 상황을 보면서 몇몇 사람들은 내가 조금의 운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로(제주) 이사를 온 뒤 큰 성장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는 1학년생.

고교 때 사제 동행 프로그램으로 제주 수학여행을 오면서 나처럼 여행 간다고 해서 기쁘게 짐을 챙겼을 세월호 학생들과 그 자식들과의 마지막임을 모르고 보낸 부모들을 생각하며 마음 아팠다는 아이의 마음에서 세대를 뛰어넘은 온기가 전해졌다. 가까이서 인생을 듣는 이 얼마나 되랴. 시대와 함께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이 이 땅, 삶의 황무지를 가꾸고 꽃을 피워올린 사실을 늦게라도 알까.

한 해를 보낸다. “아마 내가 쓰는 이 글이 할머니의 인생을 기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더 잊어버리기 전에 쓸 수 있어 다행이라 했던 학생의 마음을 떠올린다. 약속을 지킴보다 지키지 못함이 얼마나 많은지. 우린 어느 해보다 격류의 한 해를 보낸다. 그리고 이 한 해를 보내기가 버겁게 떠나는 젊은 목숨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잃지 않고 사는 인생은 없다

한 해를 보낸다. 오래 막혔던 남북이 솔솔 소통할 수 있는 숭고한 오솔길을 냈고, 새해 한라산에서 합수를 꿈꾼다. 오랜 고통의 순간을 견뎌내고 붉은 동백을 단 주름진 70년의 4·3을 보내고, 예멘 난민의 아픔에도 뜨겁게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잃었다고 생각하는 모두에게도 위로를 보내자. 아무것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 다행이야. 그래, 괜찮아 할 수 있기를. 잘 가라, 무술년이여.

허영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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