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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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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눈칫밥 먹는 ‘엘더’? 그대의 꿋꿋함에 박수를

로마 황제가 존경 바친 노예 에픽테토스, 자유인 되기 위한 인내의 가치 실현
등록 2025-03-14 22:10 수정 2025-03-21 14:36
에픽테토스 초상. 위키미디어

에픽테토스 초상. 위키미디어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다. 중년의 생활인에게 이 말은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어느덧 직장에서는 ‘엘더’(Elder)라는 말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50대가 돼서도 임원이 되지 못한 채 근근이 버티는 직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리더’(Leader)가 아닌 나이 든 사람이라는 뜻이니, 기분 좋은 의미는 아닌 듯싶다.

엘더들은 눈칫밥 먹는 신세이기 일쑤다. 승진은 물 건너간 지 오래, 조직 안에서 미래를 꿈꾸기란 어렵다. 자신이 간다고 반겨주는 부서도 없을 터이다.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새 일을 찾기도 어렵다. 1차 베이비붐 세대(1953~1963)들은 50대에 호기롭게 회사 밖으로 자기 길을 찾아 나섰다. 이들이 어떻게 망하고 스러졌는지를 지금의 50대 생활인들은 낱낱이 지켜보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금의 일터 안에서 버티려 한다. 하지만 희망 없이 버티기란 무척이나 고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굴욕감이 밀려든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아마도 맞는 말이리라. 그러나 지금의 내 삶도 지옥이지 않은가. 이제 나에게는 탈출구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이런 막막함에 속을 삭이는 중년이라면 로마 시대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 55?~135?)에게 귀를 기울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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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돈 아쉽지 않으면 삶도 충만한가

에픽테토스는 노예였다. 다리에 장애도 있었다. 그의 인생 모토는 “견뎌라, 또 참아라”였다고 한다. 놀랍게도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누구보다 자유인다운 품격으로 돋보였던 사람이다. 심지어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에게 열렬한 존경을 바쳤을 정도다. 어떻게 에픽테토스는 밑바닥의 삶을 의연하고 꿋꿋하게 헤쳐갔을까?

우리 마음은 초점 오류(Focusing Illusion)에 빠지기 쉽다. 이는 무엇인가에 관심이 꽂혔을 때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어버리는 잘못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쾌적하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면 인생이 행복할까? 다른 곳에 사는 이들도, 심지어 캘리포니아 주민들도 대부분 이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다른 답을 알려준다. 행복도는 캘리포니아나 다른 지역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대도시의 삶을 떠올려보라. 캘리포니아만큼 공기가 좋지 않아도, 일자리를 찾고 문화를 누릴 기회는 더 많다. 기후가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은 꼭 절대적이지 않다.

중년의 생활인들도 이와 비슷한 초점 오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마다 승진해 높은 자리에 있다면, 재산을 더 많이 모았으면 지금의 인생이 더 살 만할까? 조금만 둘러보아도 그렇지 않음을 금방 안다. 세상은 화와 우울로 가득한 윗사람으로 가득하다. 표정 어두운 부자도 무척 많다. 자기를 이용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주변에 대한 의심,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시에 대한 억울함으로 그들 마음은 늘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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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벼랑 끝으로 밀리고 있는 중년은 늘 지위와 돈이 아쉽다. 그렇지만 언제나 절실했던 이 두 가지는 내 삶을 오롯하게 만들지도, 나에게 충만한 만족을 안기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중년인 그대는 이제 인생을 지배하던 초점 오류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중년은 당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잡아야 할 때다. 인생은 중년에도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에픽테토스의 책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

에픽테토스의 책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


내 안의 참을성 발견하면 흔들리지 않아

“한 마리 말(馬)이 자부심에 넘쳐 ‘나는 아름답다’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고 말할 때, 그대는 말의 좋은 점에 우쭐해 있을 뿐이다. 너 자신의 것이 아닌 뛰어난 것으로 자랑하지 말라.”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0년)의 충고다. 돈과 지위는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잠시 가진 것일 뿐이다. 돈 자랑, 권력 자랑이 얼마나 재수 없게 다가오는지 떠올려보라. 더 많은 재산을 쌓고 더 엄청난 권세를 누린다 해도 소용없다. 내 일상을 따뜻하게 하는 진정한 사랑과 존경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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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너보다 더 부자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더 낫다’ ‘나는 너보다 더 말을 잘한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더 낫다’ 이런 표현들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나는 너보다 더 부자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가진 게 많다’ ‘나는 너보다 말을 잘한다. 그래서 내 말솜씨는 너보다 낫다’. 그렇지만 너는 재산도, 말솜씨도 아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좋은 삶을 가꾸고 있는지는 재산이나 권력 따위로 가늠되지 않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돈도 지위도 마뜩잖은 중년인 그대는 어떻게 해야 좋은 삶을 가꿀 수 있을까?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우주는 우리가 좋은 삶을 가꾸기 위해 때마다 시련이라는 성장 과업(?)을 던져준다. 그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당신은 아름다운 이를 보고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마음이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대는 그대 안에서 자제력을 찾을 것이다. 어쩌지 못할 힘든 일이 버거운가? 당신은 그대 안에 있는 인내심을 찾아낼 것이다. 욕이 절로 터져 나오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그대는 당신 안에 있던 참을성을 발견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 습관을 들이다보면, 그대 마음 밖의 무엇도 더 이상 당신을 흔들지 못한다.”

 

나이 들수록 난도 높아지는 인생

시련도, 갈등도 없는 드라마는 재미도, 의미도 없다. 그대에게 쏟아지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 덕분에 그대의 인생은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렇기에 중년인 당신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맞닥뜨린 버거움 앞에서 내가 보여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 “내가 의연하고 좋은 사람이라면 나는 이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에픽테토스는 “네가 바라는 데로 세상이 굴러가기를 원하지 말고, 마땅히 가야 할 방향대로 굴러가기를 바라라”고 힘주어 말한다. 헛된 희망은 되레 절망을 부를 뿐이다. 인생은 나이 들수록 난도가 높아지는 게임과 같다. 이겨내야 할 고난은 앞으로도 점점 더 자주, 더 센 수준으로 다가올 테다. 이를 이겨내는 가운데, 나는 강하고 고결한 영혼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면서 내 삶도 훨씬 다채롭고 의미 깊게 될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조언은 언뜻 정신 승리(?) 하라는 뜻으로 헛헛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픽테토스의 말대로 사는 이들은 현실에서 존경받는다. 부도난 회사를 책임진 대표를 예로 들어보자. 온갖 비난을 무릅쓰면서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마지막 직원 한 명까지도 최대한 배려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망할 운명의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투사들은 또 어떤가. 그들에게 약속된 밝은 미래는 없었다. 그래도 이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고결하고 가치 있게 자기 삶을 이끌었다.

자기 잇속만 챙기며 약빠르게 산 대표와 변절해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이 부러움을 살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평생, 아니 영원히 자기들에게 쏟아지는 멸시와 경멸을 피하기는 어렵다. 고난과 고통은 내 삶이 고귀하고 우러름을 받는 인생으로 거듭날 기회다. 중년인 그대가 버티고 있는 힘든 일상도 그러하다.

모든 일에는 결국 끝이 있다. 중년인 그대에게 주어진 성장 과업은 이제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였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자유인다운 삶을 살았다. 그는 언제나 아파테이아(Aphateia)를 좇았다. 이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고요한 상태를 일컫는다. 진정 강하고 위대한 사람은 어떤 시련과 위기 앞에서도 담담하고 평온하다. 중년인 당신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모든 어려움은 좋은 영혼을 위한 성장 과제

나를 하찮게 대하며 벼랑 끝으로 내모는 상황을 내가 어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를 모욕으로 느낄지, 의연하게 이겨내며 부드럽게 이겨낼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렸다. 모든 어려움은 내가 더 좋은 영혼을 갖추기 위해 주어진 성장 과제일 뿐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따뜻한 충고를 들려준다.

“명예를 누리거나 큰 권력을 떨치거나 높은 평판을 지닌 이들을 보며 그들이 행복하리라 지레짐작하지 마라. 좋은 삶의 본질은 (외적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를 깨달았다면 시기나 질투에 휩싸일 일은 없다. 장군, 원로원 의원, 권력자가 되기를 원하지 말라. 다만, 자유인이 되기를 바라라.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 그대의 노력으로 어쩌지 못할 일들에 대한 마음 씀을 내려놓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이라는 작은 책자 안에 담겨 있다. 이는 ‘핸드북’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일상의 신산스러움을 이겨낼 생생한 가르침을 담은 소책자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마음 괴로운 순간마다 책장을 넘겨보시길. 노예인 에픽테토스는 누구보다도 자유인다웠다. 중년인 당신의 일상 또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일 뿐이다. 오늘을 버티는 그대의 꿋꿋함에 박수를 보낸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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