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버리지 않고 오는 생은 없다는 듯, 11월 잎새들이 일본 오사카의 찬 바닥을 훑고 있었다. 70년 전 제주4·3 광풍의 시기, “너만은 죽지 말고 살아 있으라”고 고향의 늙은 부모가 허우적 마련해준 밀항선에 몸을 실었던 사람들. 떠나도 더 이상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윽고 당도한 땅 오사카. 며칠 전(18일) 그 땅의 사찰 통국사에선 오랜 해원의 4·3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스님들의 독경 속에 백두의 물과 한라의 물이 합쳐졌다. 살풀이와 노래가 이어졌다. 간절한 평화와 통일의 비념과 함께.
오사카. 일제강점기 수많은 제주 사람이 살기 위해 정기연락선 ‘군대환’에 몸을 실어 건너왔고, 해방 뒤에는 4·3의 탄압을 피해, 혹은 그 후유증으로 다시 몰래 제주해협을 건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합쳐져 재일 동포사회의 한 축을 이루며 사는 땅이다. 그들에게 4·3은 오랜 세월 금기의 부호였다. 이념의 낙인을 피하려 이름을 바꿔 살기도 했던. 더구나 4·3을 피해 온 그들에게 또 하나의 눈물은 남북으로 가족들이 흩어진 경우가 아닌가. 살아갈 날이 많았던, 다감하던 젊은 그들. 살았으니 살았고, 살다보니 살았다고 서로 그랬던 사람들. 끝없는 고국의 해안선을 눈꺼풀에 담고 흔들리며 하나 되는 날을 희망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난민처럼 온갖 차별과 날선 이념과 생존과 싸우며 2세, 3세의 시대를 열었다. 아무도 그 바다 건너 땅에 눈길을 주지 않을 때, 오래 침묵을 강요당한 4·3은 일본 땅에서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4·3 시기에도 마을 추도집회를 연 곳이었다. 1988년 도쿄에서 첫 공개 추도집회, 1998년부터 오사카에서 열린 위령제, 뜻을 함께한 사람들의 4·3운동은 계속됐다. 이번 위령비는 재일본 제주4·3희생자 위령비건립실행위원회가 주축이 돼 국내외 순수 민간 기부금으로 세운 결과물이다. 살아낸 이들 중 몇몇 늙은 참가자들이 모였다. 위령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떠나와 살다 오늘을 보지 못하고 떠난 그들의 얼굴이 마구 떠올랐다. 그들이 살아 오늘을 봤다면.
위령비 하단엔 둥글게 붙여놓은 고향마을 이름표. 그 아래 그 마을에서 하나씩 발로 뛰며 가져온 178개 돌멩이가 가지런히 붙어 있다. 제막식 뒤 모여든 재일 동포들의 눈이 이곳에 쏠렸다. 고향의 우둘투둘한 현무암을 손으로 만져보거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작은 돌 하나에서 숨결을 느끼듯, 고향 혈육의 체온을 느끼기라도 하듯.
한 70대 부부가 유독 그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1948년 4·3 광기의 계절, 제주도 대정읍 상모리 주민 수십 명이 토벌대에 집단 학살되던 그 겨울, 5살 아들은 31살 아버지를 잃었다. 남편 잃은 모든 여인이 그랬듯, 그의 어머니 역시 해녀 일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 큰숙부도 4·3으로 도일했다가 세상을 떴다. 열아홉에 큰숙부의 영혼이 안치됐던 통국사를 찾기 위해 온 것을 계기로 일본에서 그의 삶이 시작됐다. 재일의 삶 42년.
10살 때 오사카로 왔던, 같은 마을 사람인 아내를 만나 이 절에서 혼례를 올린 것도 기막힌 운명이다. 4·3때 갓난쟁이였던 아내도 같은 상처를 지녔다. 아내의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와 같은 날 함께 희생됐던 것이다. 아내의 숙부 역시 4·3 시기 오사카로 도피했다. 그가 막 모습을 드러낸 위령비를 보면서 눈을 붉혔다. 말은 끊겼다 이어졌다. “어떻게 잊을 수 있나요. 4남매와 여섯 손자한테 전해줘야 할 의무감이 더 나옵니다.” 광풍의 섬을 떠나 낯선 땅에서 희망을 피워낸 이들은 이젠 후손이 이 역사를 알았으면 했다. 기억은 엷어지고, 동강 나므로. 정신의 유산만은 남겨야겠기에. 4·3 경험자들은 아무도 4·3을 잊지 않았고, 절대 잊지 않았다. 언젠가 진실은 드러난다고 믿었다.
고운 한복을 입고 앉은 강안자 할머니. 그는 성공한 큰 떡집 주인이 됐다. 그는 아버지 형제들의 비애를 안다. “작은아버지도 총살됐는데… 이젠 자식들한테도 4·3을 보여주고.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죽을 것 같아 도망왔는데 살아왔다고 한 할머니는 자꾸만 손을 눈가에 댔다. 그들의 소용돌이치던 슬픈 가족사. 다른 모든 이의 가족들은 이제 뭐라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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