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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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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참기름

등록 2018-11-15 09:39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음식을 만들 때 꼭 있어야 할 것이 있다면, 있으나 없으나 무방한 것도 있다. 참기름이 나에게는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참기름 냄새를 유난히 싫어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는 딱히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한번은 백화점 식품 매장에 내려갔다가 김을 구워 파는 즉석 코너를 되도록 멀리 돌아서 가는 나를 보고 아이를 가진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압도하는 참기름

비빔밥에 참기름이 들어가는 것도 당연히 싫었다. 식당에서 먹을 일이 있으면 참기름을 꼭 빼달라고 당부하지만, 손이 바쁜 식당에서 열에 아홉은 참기름이 들어간 채로 내 앞에 놓였다. 누군가 굳이 이유를 물어오면 음식에서 참기름 맛만 나는 게 싫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굳이 이유를 들자면 참기름 몇 방울이 들어가면서 결국에는 모든 재료에서 참기름 맛만 나는 것이 싫다고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냄새는? 글쎄, 몸이 반응하는걸. 하여간 내 부엌에서 참기름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며칠 전 갑자기 좋은 참기름을 한 병 사야겠다고 말했을 때, 남편은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질 좋은 참기름을 사러 가자며 나를 데리고 나섰다. 고기를 구우면 고소한 기름을 두른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을 즐기고 다른 것 없이 참기름 몇 방울에 조물조물 무친 나물 반찬이 있으면 밥을 두 그릇도 뚝딱 비우는 사람이, 집에서는 결코 참기름이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 없었으니 재깍 집을 나서는 마음도 이해가 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외가에 가면 할머니가 솥뚜껑에 들기름을 발라 달걀을 부쳐주곤 했다.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서 목주름을 잡고 놀았는데 그렇게 할머니 목을 조물조물 만지며 부엌에 들어가는 게 제일 좋았다. 부뚜막이 낮아서 할머니가 몸을 숙이면 그대로 등에 엎드려 누운 꼴이 되었는데 그러면 개구리처럼 다리를 휘저으며 까불었다. 어깨 너머로 보이던, 들기름에 고슬고슬 타들어가던 달걀의 가장자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내 딴에는 들기름이 아닌 걸로 부친 달걀은 맛이 없다며 입에도 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들기름이든 참기름이든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어째서 멀리 냄새만 나도 고개를 돌리는 어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들어 부쩍 참기름이 먹고 싶다. 어디선가 참기름 냄새가 나면 그렇게 싫더니 입맛이 제법 당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하니까 옆에서 남편이 웃었다. 뭐가 됐든 몸이 찾는 거니까 두말 않고 먹으면 된다고. 참기름을 싫어하지 않았냐, 어쩐 일이냐 결코 묻지 않았다.

이곳저곳 수소문해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음직한 간판을 달고 있는 기름집에 들어갔더니 한 말씩 말고는 안 판다고 했다. 한 말이 얼마큼이냐니까 큰 생수병으로 네 병 반은 나온다고. 두고 먹으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걸 내 부엌에 두고 먹어본 일이 없었던 나는 참기름 한 말에 은근 소심해져서 슬며시 기름집을 나왔다.

금방 짜 병에 담아주는 동네 기름집은 포기하고 시장에 갔더니 소주병에 담겨 쪼르르 놓여 있는 참기름이 제법 눈에 띄었다. 얼마냐고 물으니 한 병에 1만7천원이라고. 지금껏 참기름을 사본 적이 없는 나는 가격을 듣고 내심 놀랐다. “참기름이 비싼 거였네요.” 언감생심 참기름병을 골똘히 쳐다보고 서 있자니 가까이 다가온 주인이 참기름 바구니를 뒤로 밀며, “비싸면 안 먹으면 되는 거야. 참으면 되지 뭐.” 나는 또 한 번 내심 놀라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자 주인은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참기름을 사고야 만 이유

그날 나는 시장의 좀더 깊숙한 곳으로 가서 똑같이 한 병에 1만7천원 하는 참기름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시장을 나올 때는 부러 그 집 앞을 다시 지나며 내게 못된 말을 뱉은 주인의 얼굴을 한사코 쳐다보았다. 기어이 다른 집에서 산 똑같은 참기름병을 보란 듯이 손에 들고 말이다. 성질이 고약하기로 치면 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유진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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