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리들의 슬픈 세월

엎드려 우는 마음으로
등록 2018-09-22 18:21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죽은 쪽도 괴롭겠지만 살아 있는 쪽도 괴롭다. 누군가 하나라도 살아남아줬다면 달랐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 헤쳐나갈 자신이 없다. 그래도 재혼할 마음은 없다. 내 인생은 그 시점에서 끝났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양로원의 신세를 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산보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고 싶다.”(, 노다 마사아키 지음, 펜타그램 펴냄)

매번 엎드려 우는 마음으로 펼쳐보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은 덮어두지 않고 왜. 간혹 남인 듯 내게 말 거는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슬픔에 가까이 가는 것에 주저하는 마음을 이해한다. 슬픔은 어렵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기쁨보다 슬픔으로부터 좀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을 익히는 쪽이다. 그래서 매번 힘들어하면서도 엎드려 우는 마음으로 펼쳐보는 책이 있다. 가 그렇다. 이사할 때도 이 책만은 상자에 넣지 않고 가방에 넣어 나와 함께 움직이곤 했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은 내게 종이로 된 가장 귀한 책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1985년 8월12일과 2014년 4월16일

1985년 8월12일, 일본 군마현 우에노무라 산중의 오스타카 산등성이에서 일본항공(JAL) 점보기가 추락해 520명이 사망하고 4명만이 생존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정신병리학자 노다 마사아키는 그로부터 7년에 걸쳐 유족들을 인터뷰하고 상담 치료를 병행하면서 기록으로 남겼다. 마침내 1992년 일본에서 출간한 이 책의 서문은 ‘1985년 8월12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날짜로부터 시작한다. 그로부터 13년 뒤 출간된 한국어판 서문의 첫머리에 ‘2014년 4월16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삶의 전부를 잃어버린 이들의 슬픔을 나는 가늠조차 해볼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슬픔으로부터 슬픔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기쁨을 누리며 자연히 기쁨을 익히는 것처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슬픔으로부터 슬픔을 배울 수 있다. 노다 마사아키는 책에 “사고나 재해로 가족을 잃은 유족은 쇼크, 분노, 긴 슬픔과 우울 상태의 시기를 거쳐, 드디어 죽은 사람이 남기고 간 생각, 고인의 유지를 깊이 듣는 때가 온다. 그리고 고인의 유지를 사회화하기 위해 슬픔을 가슴에 안고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고 썼다. “슬픔을 가슴에 안고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는 문장만큼 강인한 문장을 나는 알지 못한다. 때로 불시에 간절한 마음이 되어 이 문장을 복기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힘찬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전보다 좀더 나아진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5년 8월12일’을 통과한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2014년 4월16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은 슬픔 자체이며, 그 슬픔은 우리에게 사람이 아닌 것으로 이 땅에 살아 있지 말라고 당부한다. 노다의 증언대로, 슬픔은 개별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슬픔에 공감해 개별적 슬픔을 집합적인 슬픔으로 바꿀 수 있다.

슬픔을 배우며 살아남은 우리

그날로부터 나는 기도하며 잠드는 버릇이 생겼다. 내게 좋은 일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누구에게 청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기도한다. 내게 웃을 일이 없어도 절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끝끝내 행복이 내게 오지 않아도 삶을 증오하지 않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잠드는 일이 나를 강하게 단련한다는 것을 안다. 좋은 일이 없어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강인한 사람이다. 좋은 일은커녕 웃을 일 하나 없고 행복하지 않아도 나는 이 세상에 지지 않고 살아남고 싶다. 슬픔을 배우며 살아남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삶을 마칠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해도 나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유진목 시인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