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지 7년 만에 난민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여러분을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8월7일 저녁 제주 시내 한 카페에서 열린 ‘제주 컬러풀 워크숍’(제1225호 ‘다름을 그리고 서로를 알아갑니다’ 참조)에서 수단에서 온 난민 무함마드 아흐마드 아담(32)이 말했다. 그는 이날 행사에서 통역을 맡았지만 한국에 먼저 온 ‘난민 선배’로서 예멘 난민들에게 조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들이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 이야기하고, 계속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사람들이 당신들을 신뢰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금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 아담의 이야기를 듣는 예멘 난민들의 눈은 반짝였다.
고향의 비극은 현재진행형“10도 남짓한 한국의 초봄 날씨가 몹시 추워 덜덜 떨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2011년 3월, 청바지에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한국에 온 아담은 낯선 나라가 냉혹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고향 수단은 평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더운 나라지만 그에게 한 번도 따뜻했던 적이 없다. 인종차별과 대규모 학살, 정보경찰의 수배, 고문의 공포에 아담은 항상 떨어야 했다.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쓴 1899년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했던 수단은, 1956년 독립했지만 북쪽 아랍계 무슬림과 남쪽 아프리카계 흑인 사이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아담이 17살 되던 해인 2003년 수단 서쪽에 자리잡은 고향땅 다르푸르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기독교계 흑인 반군조직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선제공격을 하면서 내전이 시작됐지만, 정부는 반군조직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수단 정부는 아랍계 민병조직을 동원했는데 이들은 다르푸르의 마을 곳곳에서 대규모 방화를 일삼았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죽였다.
다르푸르 잔혹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유엔은 지금까지 다르푸르 학살로 30만 명이 목숨을 잃고, 250만 명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수단 정부는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란군의 불법적인 저항을 정부군이 합법적으로 막는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났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아담은 수단의 수도 하르툼의 한 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다르푸르에서 본 참상을 잊지 못했다. 그가 반정부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아담은 다르푸르 학살을 알리기 위해 하르툼에서 강연을 했다. 정부에 학살 책임을 묻는 집회도 수시로 열었고, 모금 활동도 했다. 다르푸르 학생들에게 책과 학용품을 사서 보냈다.
이 과정에서 아담은 경찰에 세 번 체포됐다. 구치소에서 물고문, 빛고문, 소음고문, 무차별 폭행을 당했던 아담의 팔에는 고문 흉터가 아직 있다. 정부의 탄압은 2011년 더욱 잔인해졌다. 학생운동가들을 마구 잡아갔다. 학생들이 소문도 없이 사라졌는데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
정보 당국의 수배 명단에 오른 아담은 수단을 떠날 것을 결심했고 친척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가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수단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출국 심사에서 수배 중인 사실이 탄로났다. 그는 가진 돈 전부(미화 100달러)를 출국 심사 직원에게 줬지만 짐을 모두 빼앗겼다. 빼앗긴 짐에는 자신의 신분과 학력을 입증할 서류도 있었다.
아담은 한국이 어디인지 몰랐으나, 친척의 도움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인천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이태원에 외국인이 많아 수단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서울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슬람 사원에서 만난 수단 사람의 집에서 한 달을 신세 졌다. 이때까지 아담은 자신이 ‘난민’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난민 인정, 기쁨보다 억울함이비자 기간(3개월)이 만료될 때쯤에야 자신이 난민 신청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난민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번 좌절했다. 난민신청자 생계지원비를 신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그에게 지원금을 주지 않았다.
건설 현장과 공장을 전전하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다. 다행히 조국에서 영어를 공부한 아담은 한국에서 난민을 돕는 ‘피란처’ 같은 인권단체에서 변역일을 할 수 있었다. 아담은 “번역을 하는 대신 수단과 다르푸르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강의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끊임없이 수단의 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혼자 준비했던 첫 번째 난민 심사에서 떨어졌다. 이의제기 소송 1심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는데 법무부가 항소를 했고, 2심에서 다시 불인정 판결을 받았다. 아담은 2016년 법무법인 어필 등의 도움으로 다시 난민 심사에 지원했고, 2017년 6월29일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아담은 다르푸르 학살을 목격한 뒤 생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때문에 첫 번째 난민 심사에서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까닭에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크게 슬퍼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았을 때 기쁨보다는 억울함이 컸다. 합법적으로 일할 수도 없었고, 전화요금도 낼 수 없었다. 7년 가까이 아무것도 못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아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학구열이 남달라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아담이었지만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것이다.
친구가 될 수 있다아담은 수단에서 한국까지 온 여정을 기록해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그는 수단에서부터 두꺼운 노트에 일상을 기록해왔다. “세계적으로 대국이 된 곳은 외부인을 받아들여 조화롭게 살아온 나라들이다. 계속 강의하고, 학생들과 대화해 폐쇄적인 한국 사회가 외국인과 난민에게 열린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면 한국도 더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아담은 수단을 떠나온 지 7년이 됐지만 아직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그립다. “만약 내일 수단의 상황이 나아진다면 나는 모레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을 한 단어로 정의해달라는 기자의 부탁에 아담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보통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람은 외국인과 난민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고 싶다. 낮에는 일하고, 세금 내고, 휴일엔 쉬고, 친구와 가끔 소주를 마시고, 화나면 화낼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를 봐주면 금세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글 이재호 기자 ph@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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