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올해도 걷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여름 뙤약볕 속에, 장대비 속에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민통선 337㎞를 걷고 있을 때 여의도에선 “정권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한숨과 “이인영을 누가 말리냐”는 쓴웃음이 함께 새어나왔다. 아니, 차라리 반응이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함)에 가까웠다. 북한의 거듭된 미사일 도발 탓에 문재인 정부의 낙관적 대북 기조를 수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세지던 때였다. 이인영과의 의리 때문에 ‘걷기 사역’을 떠나는 이들만 볼멘소리를 할 뿐이었다. 민통선 통일 걷기는 이인영의 정치를 선명히 드러낸다. 순수성의 정치, 그리고 신념의 정치.
나는 1987년의 이인영을 모른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사자후를 토해내며 광장에서 100만 학도를 이끌었다는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2018년의 이인영을 볼 때면 웜홀이 열리며 3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마치 1987년의 화석 같다. 보통 정치인들과의 밥자리는 정가의 온갖 잡스러운 정보와 배경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이지만, 이인영과의 밥자리는 대학 선배와의 세미나 분위기에 가까웠다. ‘87년’ ‘통일’ ‘정의’ ‘역사’ 같은 단어를 말할 때 여전히 목소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보면, 그에게만은 세월이 봉인된 것이 분명하다. 미완의 민주화로 끝난 6월 항쟁을 ‘완성’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가슴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정치인에게 이런 한결같음은 때로 시대착오의 유의어로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지나치게 진지한 이들을 ‘진지충’이라 부르는 시대에 ‘엄근진’(엄숙·근엄·진지)한 이인영의 매력(?)이 통할 리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86세대’ 맏형으로 늘 가장 먼저 호출됐던 이인영의 자리가 어느 틈엔가 뒤로 밀려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또래 정치인들이 페이스북·트위터·팟캐스트에서 대중의 구미에 맞는 말들로 인기를 구가할 때 그는 신념의 언어에 머물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명한 어록에 견준다면, ‘서생의 문제의식’은 탁월하지만 ‘상인의 현실감각’을 닦는 데엔 서툴렀다.
내일모레면 60대에 들어설 86세대 정치인들이 각자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이인영의 공간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를 뽑는 8·27 전당대회를 앞두고, 86그룹이나 ‘민평련계’ 내부에서도 더는 그에게 ‘전대협 초대 의장’ 프리미엄이 제공되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대표 경선에 출마할 뜻을 품은 이인영은 최근 민주당 차기 당대표 적합도를 묻는 한 여론조사에서도 후보군 10명 가운데 꼴찌를 차지했다.
그는 지난 6월25일부터 다시 민통선을 걷고 있다. 1년 새 한반도엔 깜짝 놀랄 만한 훈풍이 불어닥쳤다. 그런다고 이인영의 등을 두드려줄 이는 없다. 이젠 그의 뒤통수에 “그런다고 김정은 위원장이 알아주냐.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밖에 모른다”는 농담이 꽂힌다. 이 고행은 그가 출마할지 모르는 전당대회 전망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인영은 오늘도 걷는다. 그의 길을 간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여의도 문법이 틀린 건 아닐까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념의 정치 한계 짚었으나…
이인영과 함께 민통선 걸은 뒤 쓰는 A/S 칼럼
애프터서비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호에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탐구’한 뒤 마음에 돌덩이를 얹은 듯했다. 페이스북 앱을 열 때마다 험한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사진이 맨먼저 떴다. 일주일여 비바람을 뚫고 걷느라 남루한 모습을 한 이인영이 눈에 띌 때마다 뜨끔했다. 내가 여의도 정치의 논리로 쉽게 그를 재단하는 글을 쓰는 동안, ‘2018통일걷기’ 장정에 나선 그는 평화를 염원하며 민통선 길을 걷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걸으며 환하게 웃는 사진 속 청년들의 도전까지 냉소한 듯한 미안함이 특히 컸다.
그래서 나섰다. 지난 3일 연차를 내고 강원도 양구로 향했다. 통일걷기에 나선 40여명의 일행에 합류했다. 에도, 내가 소속된 신문 정치부에도 알리지 않았다. 기사를 쓸지 여부도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여정은 어떤 의미에서 나 자신의 ‘산티아고’였다. 훈수꾼 같은 정치부 기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정당 출입 2년여 만에 ‘현장’보다 ‘말’에 익숙해져 있었다. 12일 동안 340km를 걷는 이인영의 여정에서 단 3시간, 10km 남짓한 일정을 함께 걸었을 뿐이지만 여의도에선 고려하지 못한 것들을 보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586세대가 작은 가치들보다 거대한 담론을 앞세우는 ‘꼰대’라고 여겼다. ‘노동’과 ‘통일’을 줄기차게 말하는 이인영은 그 대표주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짧게나마 함께 길을 걸으면서, 이인영이 단순히 이념과 담론만을 앞세우는 정치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난 글에서 그를 ‘1987년의 화석’이라 표현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가치가 어떤 정치인이 외치는 가치보다 미래세대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게돼서다.
평화와 통일이라는 가치를 청년세대에게 강요할 수 없단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민통선 길 위에서 이인영은 “여기 모인 청년들이 직접 느끼는 작은 평화들이 모여 더 큰 평화로 가게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와 함께 걷는 21살 대학생은 “통일을 바란 적이 없는데 이제 비무장지대와 북한 땅이 먼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30년의 시간을 넘어 두 사람의 마음이 연결돼있는 듯한 느낌을 맏았다. 무엇보다 300명의 국회의원 중에 청년들과 울고 웃으며 열이틀을 함께 걸어본 이는 내가 알기론 없다.
30년 전 맨 앞자리에서 청년들을 이끌었던 그는 이제 약한 사람들과 함께 맨 뒤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이인영은 여정 내내 앞장서지 않고 시종 맨 뒤에서 걸으며 처지는 이들을 챙겼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참가자들의 우비를 챙겨야겠다”고 알리거나, 걷는 게 영 시원찮은 내게 말없이 등산스틱을 내밀었다. 그가 걷는 방식이 그의 정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걸으면서 그는 말했다. “남들은 저더러 대중정치인이 된 다음에 가치나 이념을 내세우라고 해요. 저하곤 잘 안맞는 얘긴데, 죽을 때까지 (가치를) 얘기하다 가도 괜찮은 것 아닌가요? 일관되게 진보의 얘기를 계속하고 싶은 거고, 그게 내가 정치하는 이유에요.” 주류 권력이 되지 못하더라도 신념의 정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가 자신의 길을 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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