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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양산박 잠시만 안녕

등록 2018-11-06 20:11 수정 2020-05-03 04:29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2년 전 ‘말진’(취재팀 막내)으로 국회에 출입했을 때,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계파’ 구도 공부였다. 온종일 정치인들의 말을 받아치고, 무식하니 ‘상투’에 가까운 관점으로 기사를 썼다. 선배들이 풀이해주고 가르쳐줘도 스스로 정치의 문법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과문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도 한 가지 정도는 있었다. 정치공학 너머의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보이지 않을 것을 옆에서, 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현장을 누비는 말진의 특권이었다. 정치인의 ‘캐릭터’를 통해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내게는 유효한 틀이었다. 막스 베버의 말대로 “분노도 편견도 없이” 자기 직무를 처리해야 하는 직업 관료들과 달리, 정치인의 결정은 그의 기질이나 그가 걸어온 정치적 행로들과 대부분 연동돼 있기 때문이다. 몇 차례 선거에서 정치인들이 내리는 선택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정치인의 품성은 그의 정치적 삶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믿게 됐다.

‘왜 어떤 정치인은 주류가 되고, 어떤 정치인은 줄곧 비주류의 길을 걸을까.’ ‘왜 어떤 정치인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어떤 정치인은 월급쟁이로 전락할까.’ 어떤 정치학 교재에도 나오지 않는 이런 질문의 답은 대개 정치인의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만들어온 선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선택은 유권자들의 삶에도 자주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선거공보물이나 자서전에는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좀더 깊이 알 필요가 있다.

‘여의도민 탐구’를 시작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공학이나 ‘말의 정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300명의 국회의원 중엔 바람을 타고 당선돼 말 그대로 ‘금배지를 주운 격’인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선거라는 대국민 오디션에서 선택을 받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멀리서 볼 땐 300명의 ‘국개의원’ 중 한 명으로 치부되는 사람일지라도, 이야길 나누다보면 “이 사람한테 이런 면이 있었어?” 하며 놀라는 일이 많았다. 그 재능이 반드시 국민이 정치지도자에게 기대하는 능력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가 대변하려는 집단의 요구를 관철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일 수 있다. 굳이 갖다붙이자면 영웅들 같지는 못하더라도 늪지대 양산박에 모인 산적 떼의 이야기를 다룬 인물들에는 비견할 만하달까. 이렇게 인간에 조명을 비추면, 정치공학이 양산하는 정치 혐오를 덜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돌아보면, 무식해서 용감했다. 국회 출입 2년을 갓 넘긴 신출내기가 원고지 8장의 칼럼에 정치인 한 사람의 자질과 품성을 논할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한회 한회가 고통이었다. 고작 11차례 연재하는 동안 ‘참을 수 없는 글의 가벼움’을 자책하며 10㎞ 행군을 하는가 하면, 민형사 소송의 위협을 당했다. 무게를 감당할 수 없던 차에 본의 아니게 그 무게를 벗게 됐다. 며칠 전 신문사 내 인사가 있어 정치부를 떠난다. 짧았던 연재도 내려놓는다. 하지만 여의도민 탐구생활은 기자생활 내내 숙제가 될 것 같다. 여의도는 나의 양산박이니까.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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