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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탕과 한방 사이

국정감사 임하는 여의도민의 자세
등록 2018-10-27 13:50 수정 2020-05-03 04:29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이 10월17일 오후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사립유치원 비리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이 10월17일 오후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사립유치원 비리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매년 가을 여의도 1번지는 달포가량 백야를 보낸다. 잠들지 못하는 밤, 불이 꺼지지 않는 의원회관. 의원실의 한 해 성적을 가름하는 국정감사 기간이다. 북적이던 국회 주변 술집들에 파리가 날리고, 거리에서 은행 열매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국감의 계절이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의원들에게 국감철은 양면적이다. 유권자의 관심을 먹고 사는 이들에게 국감만큼 한껏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는 없다. 일부 정당에선 국감 성적을 차기 총선의 공천에 반영하기도 하니, 국감 성적은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국감 성적의 주요한 평가 기준이 얼마나 많은 언론 매체에 어떤 비중으로 보도됐느냐이니만큼 자잘한 자료 여러 개보단 똘똘한 ‘한 방’이 높이 평가받는다. 꼼꼼한 분석성 자료보다는 폭로성 자료가 선호되는 이유다.

그러니 이 시기 보좌진은 기자들과 처지가 비슷해진다. 마른행주 쥐어짜듯 기획 아이디어를 짜내고, 같은 상임위에 소속된 다른 의원실에서 야무진 자료가 나와 ‘물을 먹으면’ 의원에게 꾸지람을 받는다. 보좌진에게 국감이란 무엇인지 물으니 “존재의 이유” “몸살” “수면 부족” “메뚜기 한철” 등의 답이 돌아왔다. 국감철만 되면 ‘링거 투혼’을 발휘하는 보좌진마저 있다.

299개 정예팀이 각자의 승리를 위해 내달리는 상황에서 한 끗을 가르는 건 결국 주전 선수인 의원 본인의 노력이다. 지난해 국감에서도 국가기록원을 오가며 기록을 확보해온 이재정 의원과, 군 관계자들을 만나며 취재하고 자료를 확보한 이철희 의원이 단연 압도적인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보좌진이 밤새워 쓴 질의서를 국감 당일 아침 받아들고 국감장에 들어가 시종 호통만 치다 나오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보좌진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질의서를 스스로 다시 쓰는 의원이 있고, 파워포인트 자료까지 직접 만드는 의원도 있다. 그러나 제 실력은 돌아보지 않고 보좌진의 실력만 탓하는 의원들이 국감 직후 보좌진을 우르르 물갈이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올해 국감에서 한 방을 제대로 보여준 건 자타공인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사립유치원의 횡령 비리를 실명으로 공개한 그의 용기에, 남의 방 보좌진은 “우리 영감(보좌진이 의원을 일컫는 표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박용진은 ‘폭로 전문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용기 있는 폭로는 면책특권과 정보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가진 국회의원의 책무다. 다만 폭로가 한탕에 그칠지, 세상을 바꾸는 한 방으로 이어질지를 가르는 건 정보의 ‘공익성’일 것이다. 박용진의 폭로는 유치원 공공성 강화라는 당위적 흐름에 불을 붙였다.

반면 국가대표팀 선발 논란을 일으킨 선동열 감독을 불러 별다른 사실관계도 끌어내지 못한 채 호통만 치는 여당 의원의 모습에선 딱히 공익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경찰에서 입수한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의 현장 녹취를 언론에 공개한 여당 의원을 보면서도 그가 어떤 공익적 효과를 기대한 건지 헤아리기 힘들었다. 양쪽 다 세상을 바꾸는 일과는 관련이 없다. 공분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에 그칠 뿐이다. ‘정부 감시’라는 국회의원의 효용은 바로 이 한탕과 한 방 사이에서 갈리는 게 아닐까.

엄지원 정치부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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