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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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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사랑하지 못해서 슬픈 이들에게

노회찬 위패 든 김종철을 보며…

2014년 진보의 패배를 재고하다
등록 2018-08-07 07:48 수정 2020-05-02 19:29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운구 행렬 맨 앞에 김종철 비서실장이 그의 위패를 들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운구 행렬 맨 앞에 김종철 비서실장이 그의 위패를 들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이 사람들, 서로 마음껏 사랑하질 못했네.’

노회찬 의원의 장례 기간에 정의당 관계자들을 지켜보고 취재하며 든 생각이다. 모두 가슴에 회한이 남은 듯했다. “마지막 만났을 때 좀더 살갑게 이야기 나눌걸 그랬어요.” “늘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는데….” 비슷한 말들을 했다.

노회찬을 보낸 뒤에야 후배와 동지들은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수 있었다. “아버지 같았고 스승 같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유시민조차 “늘 형으로 여겼지만, 단 한 번도 형이라고 불러보지 못했다”고 슬픔을 토해내지 않았던가. 노회찬의 길은 살아서 동지와 후배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길과는 달랐다. 가치의 전장인 진보정치판에서 ‘계파적 유대’가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헤쳐모여’를 거듭한 10년의 진보정당사가 서로에게 남긴 상처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7월27일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 때 그의 위패를 들었던 김종철 비서실장에겐 그 상처가 특별히 깊게 파였을 것으로 보인다. 2014년 내가 처음 김종철을 만났을 때, 그는 노동당 소속 후보로서 서울 동작을 보궐선거에서 정의당 노회찬 후보와 겨루고 있었다. 김종철이 6년 동안 터를 닦아온 동작을에 보궐선거의 길이 열리자 노회찬이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에서 선거대책본부장(노회찬)-대변인(김종철)으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뒤 10년 동안 진보정치가 잘나갈 때나, 어려움을 겪을 때나 고민을 함께 나누던 선후배 사이였다. 2010년 노회찬이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을 때도 김종철은 대변인을 맡았다. 이들이 보수정당의 정치인들이었다면, ‘복심’이라고 할 만한 관계였다.

그러나 선거 기간 닷새 정도 동행 취재를 하는 동안 김종철은 한 번도 노회찬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야권에서는 그에게 노회찬과 단일화하라는 목소리들이 쏟아졌고, 그와 노회찬이 함께 나경원에 패배한 뒤엔 “노회찬 떨어뜨리려고 나왔냐”는 비난을 들어야 했는데도 말이다.

그런 김종철을 지난 총선 뒤 ‘노회찬의 비서실장’으로 다시 만났을 땐 당혹스러웠다. 암만 정치가 흩어지고 모이는 일이라 해도, ‘동작을’의 기억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실리적 공생으로 단정하고, 지난 2년 동안 그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김종철을 비롯한 정의당 후배들이 상제 구실을 하는 노회찬 의원의 장례식장에 이르러서야, 그런 판단이 얼마나 손쉽고 얄팍한 것이었나 돌아보게 됐다. 김종철은 “(한때) 속으론 섭섭했지만, 그런 걸로 그르칠 인연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헤어지고 만나면서도 그들 각자가 그려온 궤적은 결국 더 나은 진보정치를 향한 길이었다는 걸, 노회찬이 떠난 뒤에야 나도 알게 됐다. 적어도 그 길은 여느 정당처럼 생존을 위한 이합집산이 아니라, 진보의 싹을 살려두려는 만남과 이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원망할 노회찬도, 사랑할 노회찬도 떠나고 없다. 김종철을 비롯한 노회찬의 후배들에게 또 다른 만남들을 준비할 책임이 달렸다.

엄지원 정치부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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