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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뿌리를 기억하라

70주년 맞아 새롭게 떠오른 정명(제 이름 찾기) 운동…

원인 외면하고 학살에만 초점 맞추면 ‘절반의 기억’ 머물러
등록 2018-03-20 17:49 수정 2020-05-03 04:28
1988년 4월 열린 ‘4·3 추모제 및 진상규명 촉구대회’에서 제주 지역 대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1988년 4월 열린 ‘4·3 추모제 및 진상규명 촉구대회’에서 제주 지역 대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해방공간은 극적인 시대였다. 해방과 분단, 좌익과 우익, 혁명과 반혁명의 시간이 공존했다. 해방의 기쁨과 새 세상에 대한 열망은 벼락처럼 왔다가 한순간 꿈처럼 사라졌다. 고작 3년도 채 안 된 시간이었지만 해방공간은 새 세상의 열망이 곳곳에서 분출하는 나날이었다. 그 열망은 한반도 끝자락 제주에서 폭발했다.

금기 깬 ‘순이삼촌’

70년 전,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인근 오름들에서 봉화가 올랐다. 미군정과 경찰 폭압에 맞선 자위적인 투쟁을 위해,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기치로 내걸며 봉화가 올랐다. 평범한 제주민들도 선거를 피해 산에 올랐다. 결국 제주 3개의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의 투표가 무효가 됐다. 제주는 단독선거를 저지한 유일한 지역으로 한국현대사에 남게 됐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제주도민 10분의 1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됐고, 금기의 시간이 이어졌다. 제주4·3의 기억이 표출되려면 10여 년 뒤 도래할 4·19라는 혁명적 상황을 기다려야 했다.

4·19혁명 직후 1960년 5월23일 국회에서 거창, 함양, 남원, 영암, 함평, 문경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 조사단 구성이 의결되자 제주에서도 4·3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졌다. 그 계기는 1960년 5월 제주대학교 학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해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호소문을 에 발표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 양민학살 관련 현지 조사에 앞서 제주신보사가 6월2일 사고(회사에서 내는 공고)를 내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렸다. 접수된 신고는 사흘 만에 1259건, 인명 피해는 1457명이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진상규명 논의는 중단됐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쿠데타 직후 제주뿐 아니라 전국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인사들이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 금기를 깬 것은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이었다. 1978년 에 발표된 은 북촌리 학살 사건을 그린 소설로서 4·3의 참혹상과 상처를 폭로해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등 필화 사건을 겪었다.

이후 4·3의 조직적 진상규명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986년 무크지 에 이산하의 시 ‘한라산’이 발표되며 4·3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40주년을 맞아 추모모임과 학술세미나가 열렸고, 1989년 처음 공개 추모제가 거행됐다. 1989년 5월10일에는 제주4·3연구소가 조직돼 현장에서 진상규명 작업을 시작했다.

학계에서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4·3 연구가 시작됐다. 제주 지역에서 헌신적인 증언 채록이 이뤄졌고, 미국 자료가 공개되며 연구가 활기를 띠었다. 1988년에는 자료집 과 가 출간됐다. 이어 본격적인 학술연구로 정치학 논문 두 편이 나와 4·3 연구의 기초를 담당하게 되었다. 1980년대의 연구는 역사적 사실을 복원함으로써 4·3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민주화운동 거치며 진전

특히 1980년 말 시작된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40여 년 동안 침묵 속에서 한을 삼켜왔던 유족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4·19 이후 1987년 6월 항쟁까지 유족들의 공적 증언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은 그동안 4·3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는지 보여준다. 1980년대 진상규명 운동을 통해 4·3은 제주도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중앙으로 진출하게 됐다. 4·3이 제주도만의 4·3이 아니라 통일운동이자 민중항쟁으로 한국현대사에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4·3 진상규명 노력을 진전시킨 것은, 다시 제주 출신 인사들과 제주도민이었다. 제주4·3연구소의 증언 채록과 1990년 6월부터 연재된 의 가 출판되며 4·3의 원인, 전개 과정, 피해 상황 등 전모가 소상히 드러났다. 1992년 제44주년 4월제 행사와 세미나는 제주도를 넘어 전국 단위로 확대돼 열렸다. 그런 의미에서 1992년은 4·3의 전국화가 추진된 해였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등 제주와 서울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는 4월1일부터 7일까지를 ‘4·3영령 추모 기간’으로 정해 추모제를 열었다. 한편, 그해 다랑쉬굴에서 처참한 4·3 피해자들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 시기 진상규명 운동의 성과는 재야의 틀을 벗어나 공적 기구에서 해결책이 모색됐다는 점이다. 1993년 3월20일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이듬해 제주도의회는 ‘4·3피해신고실’을 개설했다. 피해 신고에 따라 1995년 제주도의회는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를 펴냈다.

1994년은 4·3 시민단체와 유족회가 함께 주최한 첫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제주 지역 12개 시민단체가 모여 구성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는 1989년부터 5년째 4·3추모제를 열어왔다. 이에 반해 반공유족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당시 ‘4·3유족회’는 1991년부터 3년째 따로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었다.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1998년 4·3 50주년을 전후해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위해 ‘제주4·3특별법 제정’ 운동이 제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새천년을 맞이하기 전에 특별법을 쟁취하기 위한 제주도민과 유족들, 시민단체들의 헌신적인 투쟁이 이어졌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12월16일 특별법이 통과됐고, 2000년 1월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됐다.

새천년에 제정된 제주4·3특별법에 기반해 2003년 10월15일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10월31일 국가권력의 잘못에 공식 사과했다. 보고서는 4·3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다. 4·3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식 이해가 바뀐 것이다.

극우세력의 4·3 흔들기
‘제주4·3’ 희생자 유가족과 도민들이 2008년 4월 60주기 4·3 희생자 위령제가 끝난 뒤 제단에 헌화·분향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제주4·3’ 희생자 유가족과 도민들이 2008년 4월 60주기 4·3 희생자 위령제가 끝난 뒤 제단에 헌화·분향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진상조사 보고서 채택 이후 본격적으로 4·3 명예회복 과정이 진행됐다.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고 4·3기념관, 4·3평화재단이 조직됐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3 최대 암매장지로 파악된 제주공항 등에서 부분적이나마 희생자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현장의 참혹함은 유족과 도민에게 4·3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일깨워줬다.

이명박 정부에서 극우세력의 4·3 흔들기가 계속됐으나, 그때마다 실패로 끝났다. 적극 대응한 것은 유족회였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4·3의 피해자인 유족들의 인식과 역할이 크게 달라졌다. 2001년 3월 전체 유족을 통합한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가 조직되면서, 유족들은 진상규명의 주체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2014년 4·3을 국가추념일로 제정했다.

60주년인 2008년 4·3의 정명(正名·제 이름 찾기)을 둘러싼 문제제기가 본격화했다. 이는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배제된 ‘항쟁의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자는 논의와 맞물려 있다. 4·3 추모행사 직후 제주4·3진상규명 명예회복추진 범국민위원회가 주관한 ‘4·3의 정명을 위한 토론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제주4·3연구소 주최의 ‘4·3 6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무고한 이들의) 희생에 초점을 맞춘 명예회복 작업이 대중적 공감을 얻는 상황에서 (제주도민들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항쟁의 역사 찾기는 현실적으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제 4·3은 70주년을 맞는다. 70주년은 피해자와 유족들이 생존할 때 이뤄지는 마지막 기억투쟁이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기념사업위원회, 전국 조직으로는 범국민위원회를 만들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개별 배상과 사자명예훼손 조항이 들어간 4·3특별법 개정안을 만들었고, 다시 한번 역사적 정명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70주년을 맞아 전국에 4·3분향소가 설치되고, 4월7일 광화문문화제가 열린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4·3아카이브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제주가 아니라 서울 중심부에서 시민들이 4·3과 만날 것이다.

70년 전 제주는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뿐 아니라 처참한 공동체 파괴를 겪었다. 그 고통 속에 이뤄진 진상규명 운동은 제주도민 내부의 갈등을 치유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화해하는 등 과거사 청산의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또 평화교육이 이루어져 4·3은 미래 세대와 만나고 있다. 제주도민에게 4·3의 상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현재진행형이다.

원인 묻어둔 채 결과만 논해

그러나 4·3이 왜 일어났는가를 기억하는 것도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4·3의 원인은 묻어둔 채 결과만을 얘기한다. 물론 참혹한 죽음 앞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운동이라는 4·3의 ‘저항과 항쟁’의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4·3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며,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면 제주도민이 역사 속에서 항쟁의 주체로 존재했던 사실을 배제하는 ‘절반의 기억’에 머무르고 만다. 학살론을 통해 국가폭력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이것만 강조하면 제주도민은 일방적인 피해자 지위에 머무르고 만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가해자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뜻한다. 저항적 기억투쟁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양정심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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