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동안 이어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극한 혼란 속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에게 일본은 더 나은 삶이 보장된 ‘신천지’였고, 차별은 당할지언정 학살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도피처’였다. 그렇게 일본으로 흘러든 이들이 제주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이른다. 제주 출신 자이니치(재일 동포)들이 가족과 친지에게 보내온 돈은 1980년대까지 제주 경제를 뒷받침하는 한 축이었다. 이들의 끈질기고 위엄 있는 삶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일부다.
제주4·3 70주년을 맞이해 일본에서도 각종 위령제나 기념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4·3 위령제와 기념행사는 일본에서도 4월 연례행사로 정착된 지 오래지만, 70주년을 맞은 올해엔 예년보다 각별한 열의와 기운이 넘친다.
일본의 4·3운동먼저 3월10~11일 이틀 동안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사회와 제주4·3―일본에서 보는 시각’이라는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제주에서 열리는 70주년 추모식엔 일본에서도 200명 넘는 방문단이 참가한다. 또 일본 도쿄에선 4월21일, 오사카에선 4월22일 대규모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다. 오사카에선 올가을을 목표로 독자적인 4·3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 밖에 4·3의 진실을 전하는 영화 상영, 패널 전시회, 학습회 등 다양한 행사가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준비돼 있다. 올해 일본의 4·3 70주년 기념사업은 예전에 없던 규모와 다양성을 자랑하는 사업이 될 것 같다.
돌이켜보면, 줄기차게 이어져온 일본의 ‘4·3운동’에서도 40주년(1988년), 50주년(1998년), 60주년(2008년) 등 10주기 사업들이 늘 운동의 큰 고비가 돼왔다. 4·3을 다룬 대하소설 저자 김석범이나 조선사 연구의 선구자 고 가지무라 히데키(1935~1989) 등이 준비한 40주년 기념 강연회에는 500명 넘는 시민들이 참석해 일본 4·3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4·3 유족이 대거 참석한 50주년 행사는 일본 4·3운동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됐다. 60주년 때엔 100명 규모의 제주 방문단이 고향을 찾는 모습이 일본 《NHK》 장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일본 전국에 방송됐다.
일본 4·3운동의 발자취와 성과에 비추어볼 때 올해 70주년은 어떤 의의가 있을까. 70주년을 앞둔 일본 4·3운동의 지향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글에서는 일본 4·3운동의 과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000년 만들어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은 제10조에 ‘대한민국 재외공관’에 피해자와 유족 피해 신고를 접수하는 ‘신고처’를 설치하는 조항을 담았다. 이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등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를 진상 규명하는 다른 과거사 관련 법률에는 볼 수 없는 규정이다. ‘재외공관’이라 되어 있지만, 여기서 ‘재외’는 주로 일본을 뜻한다. 4·3과 재일동포 사회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규정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에 오사카와 제주를 잇는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라는 이름의 여객선 직항로가 만들어지면서, 1930년대 중반 제주도 인구의 약 4분의 1(5만여 명)이 일본에서 살게 됐다. 오사카엔 자연스럽게 제주도 출신자들의 확고한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를 넘는 제주도 주민의 생활권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사카, 일본 속 작은 제주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많은 제주인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가 4·3 전후의 혼란을 피해 다시 오사카 등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GHQ)은 일단 한반도로 귀환한 한국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도항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이 시기 한국인의 도일은 밀항이라는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 기록 등 이 시기의 밀항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면, 4·3을 전후한 시기(1947~49년)에 대략 5천~1만 명의 제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4·3의 진상 규명은 밀입국자를 포함해 만들어진 재일동포 사회를 외면해서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
‘4·3 콤플렉스’라 일컫는 4·3 체험자의 좌절감이나 심리적 굴절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재일 제주인 사회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권력에 저항한 대가로 4·3 체험자들은 너무나 크고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일에 입을 굳게 다물고, 정치 자체를 기피하거나 금품에 집착하는 특성을 갖게 됐다. 반대로 권력이나 조직에 과잉 충성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일본에서도 4·3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압력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출신자가 많은 오사카에선 이런 공기가 짙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일본 4·3운동은 이런 침묵의 벽이나 압력을 무너뜨리고, 4·3을 누구나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조사하고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4·3운동은 한국에서 이뤄진 여러 진전에 보조를 많이 맞춰왔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말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공권력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한 것은, 재일동포 사회 속 침묵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통령의 사죄는 일본 4·3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재일동포 사회가 냉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4·3의 체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넓혔다.
일본의 4·3운동은 지금 최후의, 그러나 결코 낮지 않은 장벽에 맞닥뜨려 있다. 재일동포 사회는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와 달리 ‘일본 사회’라는 하나의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2001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4·3특별법에 대한 우익 세력의 위헌 소송에 기각 판단을 내리면서도 다음과 같은 부대의견을 달았다. 즉, ‘사령관급 공산무장 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 혹은 무장봉기에 ‘주도적·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은 4·3특별법이 정하는 ‘희생자의 범위’에서 배제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4·3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집행기관인 ‘4·3위원회’도 이 헌법재판소의 의견에 따라 무장봉기를 주도한 남로당 ‘핵심 간부’나 무장대 ‘수괴급’은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희생자 선별 기준을 정했다.
이른바 ‘북쪽’, 즉 총련계 재일동포 중에는 ‘핵심 간부’나 ‘수괴급’에 해당할 만한 관계자나 그 친족·자손이 적지 않다. 4·3특별법에 근거해 이뤄진 재일동포 사회의 희생자 신고 접수가 애초 예상보다 부진했던 것도 공식화된 ‘선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일동포 사회의 이런 특수성을 고려할 때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앞으로 절실한 과제로 부각될 것이다. 4·3 무장봉기를 ‘반역’으로 보는 시각이 공적인 논리와 기준으로 지속되는 한, 재일동포 사회에서 4·3을 둘러싼 침묵의 압력도 지속될 것이다.
물론 ‘남로당’이라는 공산주의 정당이 대한민국 정권 수립 과정에 무력까지 써가며 저항했던 만큼 항쟁 지도부를 포함한 모든 희생자의 명예를 공식적으로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선·단정 반대 투쟁이 왜 제주도에서만 유일하게 ‘무장투쟁’으로 치달았는지 숙고해야 한다. 즉, 4·3 무장봉기는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탄압이면 항쟁이다’는 무장대의 주장에서 드러나듯, 미군정 아래서 친일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 제주에서 휘두른 횡포에 자위적 반항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도민 대다수도 그런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외부의 폭력이 혹독할수록 그 저항의 방법도 격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명예회복2006년 6월 4·3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군인과 경찰도 ‘희생자’로 인정해야 할지에 관한 법제처의 판단이 있었다. 당시 법제처의 판단은 “군경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2006년 6월20일치). 이데올로기적 극한 대치를 상대적으로 파악하는 이런 시각은 당시 무장대에도 적용돼야 한다. 무장대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해방 정국의 과도기적 혼란 속에서 분출된 이데올로기와 정의의 관념을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화해와 상생의 정신과 어긋난다. 어쨌든 모든 4·3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공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한, 재일동포들에게 4·3 해결은 여전히 미완일 수밖에 없다. ‘모든 4·3 희생자의 명예회복’이야말로 70주년을 지향하는 일본에서 4·3운동의 핵심적 과제다.
촛불혁명을 이어받은 새 정부 아래서 4·3 70주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재일동포에게 더없는 행운이다. 일본에서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그해 일본 4·3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50주년 행사가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있던 이듬해(2004년)에는 1천여 한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56주년 기념행사(오사카)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민단·총련의 지단장급·지부위원장급 임원들이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려,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화합’의 행사로 진행됐다.
10년 가까운 보수·우파 정권 아래서 4·3운동 성과물에 대한 극우세력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래서 운동 역시 수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을 거친 한국 사회엔 정의로운 사회 개혁의 기운이 넘치고 있다. 다시금 과거사 재정립 흐름이 고조될 것이 전망된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은 새 정부 아래 개헌 논의와 관련해 “헌법이 개정되면 그동안의 헌재 결정도 바뀌어야 한다. 헌법 재판은 사회 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2018년 2월8일치). 물론 이 발언은 4·3에 대한 헌법 판단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개헌 논의의 쟁점 중 하나는 “대한민국의 법통”이라는 맥락에서 1948년 정부 수립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2001년 4·3 항쟁 지도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도 영원불변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70주년이 놓아야 할 시금석올해 70주년 일본 행사에 10년 만에 민단과 총련 임원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 제주방문단에 오랫동안 한국 입국이 어려웠던 ‘조선적’ 동포들도 참가하게 됐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 진행 중인 4·3 70주년 기념행사는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남북 화해의 뜻을 담은 행사라 할 수 있다. 물론 참다운 화해는 항쟁 지도부를 포함하는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 없이는 성사될 수 없다. 70주년 행사가 그 시금석이 될 것을 기원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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