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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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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를 읽다

제주 4·3을 인류 보편적 비극으로 승화시킨 김석범의 <화산도>…

70년 전 비극을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등록 2018-03-20 18:12 수정 2020-05-03 04:28
김석범은 제주4·3의 비극을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로 기록했다. <화산도>는 ‘재일조선인 문학은 일본문학 하위에 있다’는 일본 문단의 오만한 편견을 깬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류우종 기자

김석범은 제주4·3의 비극을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로 기록했다. <화산도>는 ‘재일조선인 문학은 일본문학 하위에 있다’는 일본 문단의 오만한 편견을 깬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류우종 기자

두 번째는 더 깊고 아린 체험이었다. 지난 1년 여에 걸친 월례 세미나를 통해, 김석범(1925~ ) 대하소설 (火山島) 전 12권을 다시 완독했다. 2015년 10월 가 한국어로 완역된 직후 약 석 달에 걸쳐 처음 독파한 지 2년여 만이다. 좋은 작품 읽기가 늘 그러하듯이, 첫 독회에서 스쳐 지나갔던 문제적 장면들, 애틋한 마음들, 가슴 시린 비극들, 뇌리를 관통하는 생생한 묘사들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두 번 읽기를 통해, 나는 이 기념비적 작품의 뛰어난 문학성과 비범한 상상력, 치열한 역사의식, 인간과 사회·혁명에 대한 깊은 안목을 다시금 환기하고 싶다.

일본 문인들의 편견을 깬 수작

누구보다 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지닌 우카이 사토시 히토쓰바시대학 교수는 “ 전권의 한국어 번역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동아시아에 있어, 아마도 최대의 문화사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라고 언급했다. 그렇다. 는 단지 제주4·3을 배경으로 삼은 한 편의 소설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남북한, 일본과 미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원과 의미를 발본적으로 되묻는 귀한 사료이기도 하다. 는 단지 한 번 읽고 끝낼 소설이 아니라, 수많은 문제의식과 첨예한 어젠다를 품고 있는 문화 자산이자 늘 되새겨야 할 우람한 고전이다. 일본인 우카이 교수의 평은 이 작품이 지닌 문화적 보편성을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2017년 9월18일 ‘김석범 문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화산도와 나-보편성에 이르는 길’에서 “‘일본어로 조선을 쓸 수 있는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 고향 제주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대학살 ‘4·3’을 테마로 글쓰기를 시작한 나에게 일본어로 조선에 대한 글을 못 쓰게 된다면, 글쓰기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애초에 한국어로 를 쓰다 그는 결국 일본어로 를 완성했다. 이 점은 일본어로 조선(문학)의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렬한 자각의 발로이다. 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 문학은 상위 문학이고 재일조선인 문학은 그 밑에 있다’는 편견, 즉 ‘조선을 테마로 한 작품은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완강한 선입견에 대한 확고한 저항의 찬란한 결실이다. 작가는 일본어로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대마도 밀항 때 만난 여성의 상처에 충격 받아
재일동포로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산 김석범은 부모의 고향 제주에서 일어난 참혹한 비극을 평생 동안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류우종 기자

재일동포로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산 김석범은 부모의 고향 제주에서 일어난 참혹한 비극을 평생 동안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류우종 기자

를 통해, 4·3의 전개 과정은 물론, 친일 문제와 친일문학, 해방 직후의 역사적 과제, 한국 현대사와 미국의 역할, 제주의 풍속과 인문지리, 혁명과 이념에 대한 사유와 성찰, 재일조선인의 상처와 저항, 밀항과 귀환의 험난한 여정, 해방 직후 일본에서 귀국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투쟁과 내면, 서북청년단의 행태와 욕망 등은 그 최대의 미적 형상화에 도달한다. 이 모든 주제들은 작품 속에서 단단하게 결합되어 적절한 자리에 배치된다.

4·3 때 일본에 있었기에 현장 확인을 위한 답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김석범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가 그로 하여금 장장 20여 년 동안 대하소설 를 쓰게 만든 마음의 동력이었다. 작가는 4·3의 참화를 피해 대마도로 밀항한 친척과 함께 만난 여성이 고문으로 유방이 사라진 것을 비통한 마음으로 확인하며, 제주에서 자행된 미증유의 대학살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때로 슬픔은 그 어떤 정서보다 강렬한 힘이 된다.

해방 직전 일본에 있는 가족과 영원히 이별하겠다는 각오로, 홀로 조국을 거쳐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충칭(중경)으로 망명을 시도했던 작가 김석범의 행로를 생각해본다. 해방 직후 국학전문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위당 정인보를 만나 대화하기도 했던 학생 김석범이 있었다. 1946년 2월8일부터 9일 사이에 종로 YMCA 강당에서 열린 조선문학가동맹 주관의 ‘전국문학자대회’에 참석해, 시인이자 비평가인 임화가 연단에서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 과제에 관한 일반보고’를 발표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청년 김석범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그 마음과 체험, 역사적 상상력이 곳곳에 켜켜이 배어들어 있다. 김석범은 20대 초반에 간접 체험한 고향 제주(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고향 제주를 마음속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의 참혹한 비극을 평생 동안 창작의 원동력으로, 사회적 실천의 근거로 삼아왔다.

“작가를 만나면 작품보다 환멸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김석범 선생은 참으로 진솔한 편이다.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했던 재일동포 조동현의 발언을 기억한다. 오랜 세월 작가 김석범을 깊이 이해하고 도운 그는 “를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토록 가벼운 시대, 때로 그 어떤 무거운 역사적 과업과 깊은 인식도 스마트폰 앞에 속수무책인 시대에 200자 원고지 2만 장에 이르는 대하소설 를 독파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벌어진 슬픈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곡진한 애정과 이해 없이는 참으로 힘겨운 도정이 아니겠는가.

문학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

올해로 우리 나이로 아흔넷에 이른 김석범은 현재 이후의 스토리 (海の底から)를 일본의 대표 월간지 (世界)에 연재하고 있다. 에는 이방근의 자살과 남승지의 일본 밀항 이후에 전개되는 얘기, 즉 제주에서 그토록 애잔한 관계였던 남승지와 이유원이 일본에서 맞이하는 슬픈 해후와 어긋남의 장면이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또한 4·3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한 남승지와 한대용이 이방근의 삶과 죽음을 회상하는 대목도 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다. 이번 2018년 4월호 에는 14회 연재분이 수록되었다. 90대 중반에 가까운 연세에 아직도 소설을 월간지에 연재하다니, 노대가의 참으로 엄청난 문학적 열정의 소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이 지속되는 한, 4·3에 대해 계속 발언하고 형상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의무감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마음이 과연 가능했을까.

이제 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이해는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를 비롯한 김석범의 다른 저작들이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또 한 편의 후일담이라 할 수 있는, (地底の太陽, 슈에이샤, 2006)과 (1993), (1990)을 비롯한 김석범의 산문집과 평론집도 한국어로 옮겨야 하리라. 최인훈의 산문과 소설의 관계가 잘 보여주듯, 김석범의 산문 역시 소설과 밀도 깊은 관계를 이루며 또 하나의 독창적인 세계 인식을 우뚝하게 보여준다.

김석범은 “문학작품을 통해 해방 공간의 역사를 재검토하는 것이 창작의 기본 의도이다. 앞으로 통일이 될 때, 4·3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정리해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해 대학살을 자행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내 개인적 소망은 의 주인공 이방근을 통해 독자들이 해방 공간의 역사적 진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를 쓴 궁극적 목적은 작품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있다”고 말한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남다른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김석범 작가는 (1957)에서 로 이어지는 4·3을 소재로 한 작품과 실천 활동을 통해, 일본 지식사회에 4·3의 참담한 비극을 최초로 알리는 ‘평화를 위한 파수꾼’ 역할을 담대하게 수행해왔던 것이리라.

곧, 4·3 70주년을 맞이한다. 제주의 슬픈 역사, 더 나아가 이 땅 한반도 현대사의 상처와 모순, 그늘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민주와 평화가 번성하는 시기일수록 첨예한 사회적 대립의 역사적 내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 이 땅의 문학과 역사는 어떤 작품보다도 의 세계를 정면으로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이즈음 남과 북, 미국 사이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이 흐름에 김석범은 누구보다도 반가운 마음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는 민주화가 된 ‘북’에서도 가 독자의 손에 닿는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바 있다. 그렇다면 가 한반도에서 명실상부한 존재 증명을 하는 순간은 북한의 독자들이 자유롭게 를 탐독할 때가 아닐까 싶다.

의 문제의식 촛불과 통해

2017년 9월 중순 제1회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수상차 서울을 방문한 김석범은 일본 귀국길에 공항으로 가기 직전 이 땅의 청춘들을 만났다. 3박4일에 걸친 한국 방문의 마지막 일정은 동국대 학생들과 대화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얘기를 경청하는 증손자뻘 학생들에게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해서 너무 좋다고, 이들이 이 땅의 희망이라고, 당신들이 촛불데모(혁명)로 새로운 정부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한 주역이라고’ 말하며, 중간에 잠깐 눈물을 보였다. 그는 거듭 이 땅의 청춘들과 함께한 감격, 민주정부가 들어선 새 시대에 한국에 오게 된 소회를 토로했다.

역사가 그렇듯 작품도 운명이 있지 않을까. 두 차례에 걸친 보수 정권의 파행 이후, 촛불혁명으로 새롭게 진전한 한국 사회에선 에서 제기된 문제의식과 의제에 대한 열린 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곧 열릴 4·3 70주년 행사에서 벅찬 감격과 깊은 회한의 표정을 지닌 김석범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권성우 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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