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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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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원혼을 달래는 씻김굿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이 그린 제주 민초들의 상처…

4·3의 비극, 강정마을에서 재현되나
등록 2018-03-20 18:14 수정 2020-05-03 04:28
‘제주4·3’을 소재로 한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의 한 장면. 토벌대를 피해 굴속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고구마 등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제주4·3’을 소재로 한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의 한 장면. 토벌대를 피해 굴속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고구마 등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금기시됐던 제주4·3을 세상에 처음 알린 건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이었다. 그 뒤 회화, 음악, 연극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4·3 예술이 피어났다.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화 는 4·3을 대중적으로 알린 대표적 작품이다. 4·3의 아픔과 의미를 국내외에 알린 영화로는 오멸 감독의 (이하 )를 손꼽을 수 있다.

윤중목 영화평론가는 책 에서 “은 제주4·3을 다룬 영화다. 제주 출생의 오멸 감독은 4·3에서 기인한 가위눌림을 비로소 을 통해 흐느끼며 대속했다. 그가 ‘표현의 자유’에 의연해질 수 있도록 한 작가 현기영과 화가 강요배에 감사해야 한다”고 썼다.

흥행뿐 아니라 작품성도 인정받아

은 4·3 때 토벌대를 피해 제주 안덕면 동광리의 ‘큰넓궤’(‘큰 동굴’이란 뜻의 제주말)에 피신했던 주민들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실제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은 1948년 겨울 50~60일 동안 캄캄한 굴속에서 피신 생활을 하다 토벌대에 발각됐고, 한라산으로 도망가다 붙잡힌 주민들은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됐다.

은 총제작비 2억5천만원의 저예산 독립영화지만 커다란 대중적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2013년 3월 개봉해 관객 14만 명이 보았다. 흥행과 더불어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민평론가상 등 4관왕, 2013년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극영화 경쟁 부문 심사위원 대상, 프랑스 2013년 브줄국제아시아영화제 황금수레바퀴상 등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었다.

영화는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은 4·3 희생자를 위한 씻김굿이다. ‘신위(神位·영혼을 모셔 앉힌다), 신묘(神廟·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飮福·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소지(燒紙·신위를 태우며 염원을 비는 것)’ 등 제사의 절차에 따라 네 시퀀스로 전개된다. “제주4·3을 재현한다는 목적보다는 당시 이름 없이 사라진 원혼들에게 위로를 보내기” 위해 오멸 감독이 의도한 연출이다. 토벌대가 휩쓸고 지나간 빈집에 덩그러니 놓인 제기에서 시작된 제례는 희생자들의 지방을 태우며 그들을 위무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에 제주 주민들과 제주의 대자연을 담는다. 제주의 독특한 지형을 담은 숲 곶자왈, 4·3 당시 실제 주민들이 몸을 숨겼던 큰넓궤, 총을 든 토벌대와 마을 주민들이 대치하는 용눈이오름 등지에서 촬영된 무채색 화면은 말 못할 깊은 아픔을 간직한 진짜 제주의 모습을 재연한다.

토벌대에도 감자를 건넨 주민들

영화는 사건보다 사람 이야기에 집중한다. 특히 동굴에 모인 이들이 지슬(감자)을 나눠 먹으며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주민들은 집에 두고 온 돼지가 굶어 죽을까봐 걱정하고, 다리가 불편해 집에 두고 온 어머니를 모셔올 방법을 궁리하고, 마을 총각·처녀의 연애담이나 자식 혼사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들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영화는 주민이 겪은 비극뿐 아니라 ‘폭도’를 죽여야 했던 군인들의 상처도 어루만진다. “여기 있으면 죄 없는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탈영을 생각하는 병사들의 인간적 고뇌를 담으면서, 상부의 명령으로 살인 병기가 되어버린 이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인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를 뜻한다. 감자는 영화에 중요한 오브제로 자주 등장한다. 동굴에서 따뜻한 감자를 나누는 주민들, 아들 무동을 위해 죽으면서까지 감자를 품에 안은 노모, 그 감자를 가져와 동굴 주민들과 나누는 무동. 주민들을 살상한 토벌대에도 감자는 귀중한 식량이다. 박 상병은 총을 겨눴던 순덕에게 동료들 몰래 감자를 건네려 하고, 주민들은 탈영하다 부상당한 군인에게 기꺼이 감자를 건넨다. 사람들 손에 든 감자는 극한 상황에서도 빛나는 삶의 의지와 온기를 뜻한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오멸 감독은 영화에 제주의 정서와 풍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내부인인 그가 만든 영화는 리얼리티 문학을 보는 듯하다. 그는 그동안에도 데뷔작 (2009)은 물론, (2009), (2011) 등에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에는 ‘끝나지 않은 세월2’라는 속편을 뜻하는 부제가 붙어 있다. 4·3 당시 한때 친구였던 이들이 무장대와 경찰이 된 비극적 상황을 그린 영화 을 찍다가 2005년 뇌출혈로 사망한 김경률 감독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영화 엔 고 김경률 감독이 총제작 지휘로 이름이 올라 있다. 김 감독이 남긴 은 4·3을 소재로 한 최초의 극영화이자 이 있게 한 배경이자 4·3 극영화의 물꼬를 튼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관광지로 알려진 제주의 실상

그 밖에 4·3을 그린 영화로 조성봉 감독의 (1996), 김동만 감독의 (1999), 임흥순 감독의 (2012) 등이 있다.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 나온 와 는 세상에 감춰진 4·3의 진실을 드러내는 구실을 한 작품이다. 는 1949년 총탄에 맞아 턱을 잃고 반세기 이상 턱에 하얀 무명천을 두른 채 살다가 2004년 돌아가신 진아영 할머니에 관한 20분짜리 짧은 다큐멘터리다. 국가폭력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준다. 는 제2회 인권영화제에 상영된 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되기도 했다. 4·3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4·3의 잔혹함을 고발한다.

은 4·3과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통해 제주의 과거와 현재의 비극에 대해 말하는 다큐멘터리다. 4·3 때 남편을 잃은 강상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광지로 알려졌지만 실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제주도를 비춘다. ‘4·3의 원혼이 통곡한다’는 펼침막이 내걸린 강정마을의 갈등을 통해 제주도를 둘러싼 비극이 여전히 진행형임을 주지시킨다. 비극의 역사 4·3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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