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굉음이 고막을 타고 들어와 머리를 때린다. 거기 중장비 기계음이 더해져 소리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굴착기를 멈춰세웠다. 자갈이 가득 찬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간 사람이 작은 뼛조각을 찾아냈다. 유골이었다. 60여 년 만의 해후였다.
너무도 소중한 뼛조각 하나2007년 9월, ‘제주4·3사건 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의 하나로 제주국제공항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된 첫날 풍경이다. 발굴단은 기적처럼 첫날 유해를 발견했다. 발굴 장소를 퍼즐 맞추듯 찾아가던 우리는 기다란 암매장 구덩이에서 그날의 참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2007년 여름부터 이듬해 8월까지 1년여간 진행된 공항 1차 발굴 결과, 길이 32m, 너비 1.2~1.5m의 좁고 기다란 구덩이에서 유해 128구, 탄두, 탄피, 고무신 등 유류품 659점이 발굴됐다. 이후 2008년 9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이뤄진 2차 발굴에서는 길이 15.5m, 너비 4.3~5.4m의 직사각형 구덩이에서 유해 259구와 유류품 1300여 점을 발굴·수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제주공항 바닥에 파묻힌 채 침묵해야 했던 이들은 누굴까?
70여 년 전, 제주는 이념 갈등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된 고통의 땅이었다. 1948년 4월3일 무장대가 일제히 오름에 봉홧불을 올리며 투쟁을 결의했다. 미군정의 미곡(쌀) 수집령에 반대하고 친일 경찰의 부당함에 저항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단독정부·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무장투쟁에 나선다.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다. 1949년 11월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산·들판이 학살터로 변했다.
당시 정뜨르 비행장, 현 제주국제공항은 대표적인 학살터였다. 공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고 주변에 인가가 드물며 경사진 땅이 많았다. 그래서 학살 후 주검을 암매장하기 쉬웠다. 이후 이곳은 공항 활주로로 포함됐다. 그날의 ‘진실’이 영원히 묻힐 뻔했다.
그러나 목격자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트럭에 실려 정뜨르 비행장으로 향했지만 돌아온 것은 빈 트럭이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분명 그곳 어딘가에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공항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발굴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끈질긴 요구 끝에 유해 발굴의 기회를 얻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발굴을 준비했다. 마침 제주공항 남북 활주로 확장 공사로 활주로 근처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막상 공항 활주로에 서보니 옛 지형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목격자들조차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증언을 토대로 옛 지번을 측량하며 암매장지를 추정해나갔다. 옛 지번 2451번지가 유력했다.
그곳은 공항 내 전시 비축자재를 쌓아두는 곳이었다. 모래와 자갈 등을 넣어두는 구덩이다. 우선 이것을 옮겨야 했다. 그 과정에서 첫 유해 조각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그 일대에서 확인된 유해들은 부스러진 채 흩어져 있었다. 과거 비축자재를 넣기 위해 구덩이를 파던 중에 손상된 듯하다. 하지만 이 으스러진 뼛조각 하나하나는 너무도 소중했다. 누군가 애타게 찾고 있을 희생자를 찾아줄 단서였기 때문이다.
첫 발굴로 얻은 용기와 자신감제주4·3 희생자 유해 발굴의 목적은 ‘역사의 진실 찾기’ 외에도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여 유가족의 품에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희생자 유골에 남아 있는 DNA와 유가족의 혈액에서 채취한 DNA를 대조하며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92구의 신원이 확인돼 유가족 품에 안겨졌다.
이처럼 많은 성과를 냈지만, 유해 발굴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2005년 4·3 희생자 유해 발굴을 위한 예비조사를 한 뒤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6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발굴이 가능하겠냐는 회의적인 시각과 유해가 온전히 남아 있겠냐는 의문의 목소리가 거셌다. 특별법을 통해 유해 발굴의 법적 정당성은 확보했지만 무슨 근거로 함부로 유해를 파헤치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였다.
2006년 5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하천 정비 작업을 하는 사업 터에 유해 발굴 대상지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6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공사를 마쳐야 해 시일이 촉박하다고 했다. 아직 정규 발굴팀도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 구제발굴이 진행됐다. 다행히 첫날 유해 일부분이 확인됐다. 안도하고 감격했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유해는 온전했다. 증언자의 말대로 반듯이 누인 상태로 유해 3구가 확인되었다. 발목을 감싼 각반과 허리벨트까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너무나 긴장한 탓인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거르고 쪼그려 앉아 흙을 걷어냈다. 배고픔이나 다리 저림도 잊은 채 발굴에 몰입했다. 첫 발굴의 경험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 저마다 애타는 사연을 안고 주시하는 유가족들을 보며 갈등하던 맘이 굳건해졌다. 이후 4년 동안 이어질 유해 발굴 작업의 시작이었다.
2006년 10월에야 유해 발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화북천 임시 구제발굴을 마치고도 몇 달이 흘렀다. 여전히 행정은 미적거렸고,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다. (사)제주4·3연구소에서 기획·조사를 담당하고 발굴 전문기관이 발굴 현장을 맡았다. 제주대학교 법의학 교실은 DNA 감식을 했다. 국방부 유해 발굴 현장 경험자를 초빙해 체질인류학적 접근도 시도했다. 그래도 여전히 불신이 남아 있었다. 더욱 정확한 조사가 필요했다. 실패가 거듭된다면 이후 예정된 공항 유해 발굴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계획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교차 증언을 통해 팩트체크에 나섰다.
4·3은 확인할 수 있는 정부 기록 문서가 거의 없다. 그래서 목격자들의 증언이 중요 단서가 된다.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증언자들의 몫은 매우 컸다. 목격자 대부분이 고령인 탓에 엊그제 일은 까맣게 잊었지만, ‘오래전 그날’의 일은 또렷이 기억했다. 첫 발굴지였던 화북천변 현장은 물론, 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 앞의 유해 발굴 현장은 증언자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5~6겹으로 뒤엉킨 유해들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별도봉 오름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파놓은 진지동굴이 많다. 이 동굴 앞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어 그분의 도움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근처에 동굴이 여러 개 있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증언자 역시 연세가 많고 편찮은 관계로 현장 동행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땅의 지주를 찾아나섰다. 다행히 아들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며느리가 증언했다. “시아버지께서 그곳에 가면 동굴 앞쪽에선 밭을 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요. 4·3 때 돌아가신 분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 저는 해가 조금만 어스름히 기울면 무서워서 집으로 도망치듯 왔습니다.”
증언자의 시아버지는 자신의 밭 앞 동굴에서 학살된 주검들을 꺼내 가지런히 눕혀 가매장했다고 한다. 동굴 안쪽부터 입구까지 샅샅이 파들어갔다. 증언대로 유해들은 줄 맞춰 뉘어 있었다. 총 8구의 유해가 이곳 별도봉 진지동굴 앞에서 확인됐다. 이 중 2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군대 간 남동생의 생사를 몰라 애타게 기다리던 누나는 6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백골이 된 동생을 만났다.
남동생은 4·3 진압 작전을 펴던 9연대 군인이었다. 하지만 1948년 6월18일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터진 뒤 제주 출신 군인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색출된 이들은 새벽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처형됐다.
2007년 공항 1차 발굴 결과 수습된 128구의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것은 26구이다. 이들은 1950년 예비검속 희생자들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과거 4·3에 연관됐거나 기존에 요주의 인물로 분류됐던 이들을 대대적으로 검속했다. 이른바 예비검속이다. 이렇게 잡혀온 이들은 고구마 창고 등에 갇혀 있다가 일제히 처형됐다. 이때 공항에서 확인된 이들은 서귀포, 대정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잡혔다가 희생당한 이들이었다. 제주시에서 검거돼 행방불명된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주검은 여전히 공항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공항 2차 발굴 역시 평탄치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다. 3개년 계획으로 시행되던 발굴이 늦어지며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약 5m 높이로 복토된 흙을 걷어내는 작업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1차로 흙을 굴착기로 걷어내고 2차로 인부들을 동원해 손으로 걷어냈다. 그 과정에 구덩이의 윤곽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구덩이를 파내며 우리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과 마주하게 됐다.
유해들은 5~6겹으로 쌓여 짓이겨진 채 뒤엉켜 있었다. 좁은 구덩이에 259구(두개골 기준)의 유해를 묻은 뒤, 공항 확장과 함께 그 위에 흙을 덮고 장비로 눌러댔기 때문이다. 전체 발굴에 1년 넘게 걸린 터라 중간중간 현장을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도 열었다. 이때 발굴 현장을 방문한 이들은 대부분 숙연해졌다. 4·3을 부정하던 이들도, 발굴을 회의적으로 보던 이들도 처참한 죽음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은 1949년 10월 불법 군법회의로 사형당한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잡혀 있다가 살해됐다. 유류품에서 이들의 사연이 묻어났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숟가락과 위장약 병 그리고 안경까지. 누군가의 소중한 남편이고, 아들이고, 아버지였던 이들이다.
좌우 이념이 아닌 인권의 문제아직도 제주에는 4·3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가 3천 명이 넘는다.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한국전쟁 때 못 돌아온 이들, 바다에 수장되어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는 이들, 제주 땅 어딘가에 지금도 쓸쓸히 묻혀 있지만 찾을 수 없는 이들이다. 벌써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유가족들도 한분 두분 세상을 뜨고 있다. 이분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빨리 어딘가에 묻힌 희생자를 찾아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는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의 문제이다.
조미영 제주4·3연구소 이사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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