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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안 낳는 ‘만가지 이유’

등록 2018-01-16 17:41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P는 “아이를 왜 낳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혹스럽다고 했다.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P는 일 욕심이 많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고 일하면서 행복해 보이는 여성 선배가 주변에 하나도 없었다. 가끔 엄마이면서 일하는 선배를 보지만, 그는 욕심을 현실에 맞춰 줄인 듯했다. “경력 단절만 안 돼도 다행이겠지”라던 선배의 씁쓸한 얼굴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실 P는 비교적 형편이 좋았다. 양가 어머니가 모두 아이를 낳기만 하면 돌봐주시겠다고 했으니까. 그렇지만 언니의 아이를 돌보느라 1년 새 확 늙은 친정엄마를 보니 그렇게까지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안 그래도 자신을, 또 남편을 기르느라 충분히 고생하신 두 분이다. 내 아이를 위해 또 희생을 요구할 만큼 아이 낳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왜 아이를 낳지 않을까?</font></font>

아이가 행복하게 자랄까 생각해봐도 그렇단다. 초등학생인 조카들은 벌써 선행학습의 무게에 허덕이고, 언니는 아이 교육 문제로 언제나 걱정이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어떤 학원에서 시켜야 할지 걱정이고, 거기에 드는 돈도 걱정이다. P는 그런 식으로 아이를 닦달하거나 돈을 쏟아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어떤 교육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사교육 경쟁에 내몰리지 않겠다고 결심해봤자 그 대신 뭐를 줘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소용없는 일인 듯했다. P는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느냐고 했다.

P는 만일 아이가 장애라도 갖고 태어나면 어떡하나 상상도 해보았다.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은 어머니들의 사진을 본 뒤부터였다. 소셜네트워크의 타임라인에 거듭 그 사진이 올라온 날, 함께 회자된 한 특수교육학 교수의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장애인을 낳지 않는 것이 여성의 커리어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이 사회는 장애인과 그 양육자에게 너무나 각박하며, 모든 것을 ‘엄마 책임’으로 돌립니다.” 확률이 나를 비켜가도록 무작정 바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P는 물었다.

P에게 아이를 왜 낳지 않냐고 묻는 사람은 많아도 이런 고민에 뾰족한 해법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되든 아이를 낳아놓으면 다 크게 돼 있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 아이를 기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 힘들지만 아이는 정말 예쁘다”고 얘기해주는 엄마들도 있었다. 백번 동의하는 말이지만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아이가 예쁘지 않을 것 같아서 아이를 낳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젊어서 그렇지, 자식 없이 나이 들면 외로울 거라고 위협 아닌 위협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 든 부모의 일상을 채워주는 건 제 형편으로 바쁜 자식이 아니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배우자고 친구들인 것 같았다. 백번 양보해도 나중의 외로움을 피하려고 아이를 낳으라는 말은 이상했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이기적이라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다들 그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그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P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사람값은 너무 싸고, 청년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난리 아닌가. 사람 수가 좀 줄어들면 사람 귀한 줄도 알고 실업률도 낮아지지 않을까. P는 자신이 아이를 낳는 일이 왜 나라에 좋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해한다고 아이를 낳을 리는 없겠지만.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이를 낳게 설득하려면… </font></font>

P는 김지영이고 이현정이고 박소연이고 그 밖의 수많은 이름이다. 최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출범했다. 나는 이 위원회에 민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P를 설득하려면, P가 보는 여성 선배의, 초등학생 조카의, 언니의, 친정엄마의, 장애아 어머니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오래 걸릴 일이다.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P는 아이 낳지 않는 쪽을 선택할지 모르고, 저출산과 고령사회의 현실도 되돌릴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 변화들은 이 나라에 좋은 일이다.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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