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 배우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산하 조직인 ‘적폐청산 TF’(이하 TF팀)로부터 보고받은 ‘MB 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 세력 퇴출 건’의 조사 결과로 드러난 블랙리스트에 영화감독이 무려 52명(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이나 포함됐다. 이는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국가정보 전문가들로부터 영화와 영화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렇게라도 인정받은 듯해 매우 기쁘다. (웃음) ‘이명박근혜’ 정권 기간에 독립영화와 민간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해두고 싶다.
스마트폰은 사용하기 편하다는 이점이 있는 반면 (감청이나 도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난 9년을 거치며 깨달았다. 내가 아이폰을 사용하고, ‘텔레그램’이나 ‘아이메시지’를 통해 문자를 주고받은 것도 그래서다. 이번에 공개된 문화·예술인 사찰 건은 (영화인들의 일상을 집요하게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동향을 광범위하게 파악했다는 점에서 국가폭력이라 할 수 있다. KBS, MBC 같은 방송사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의사결정에 문화·예술인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작동됐다는 사실은 이를 실행한 공무원들이 있다는 뜻이다. 이들의 범법 행위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와 수사가 필요하다. (한국 영화에 대한 공적 투자의 뼈대가 되는) 모태펀드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한국벤처투자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방송사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내부 고발과 증언, 고백이 계속 나와야 한다.
개인적으로나 회사 차원에서 국가정보원 사찰을 당한 적은 없다. 기사 내용을 보니 돈줄을 쥔 대기업 투자·배급사 투자팀을 직간접적으로 압박한 게 아닌가 싶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을 통해 몇십 년 동안 이룩해온 민주주의가 퇴행했다. 영화계는 그동안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은 자신들 마음대로 ‘대통령이 직접 액션도 하는’ 히어로물을 만들려 했다. 그런 발상 자체가 영화와 영화산업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막강한 권력을 앞세운 정보기관의 사찰은 창작자를 위축시키고 이는 결국 자기 검열로 이어진다. 영화계가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 파악하는 일이 국정원 업무와 무슨 상관 있나. 국정원이 영화계를 사찰한다는 것은 이런저런 풍문을 들어 짐작한 일이지만, 실제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어이없고 분노가 앞선다.
이명박 정부 초기 부산국제영화제는 좌파 영화제로 찍혔고, 집행위원장인 나는 ‘빨갱이’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서 국정원 블랙리스트 문건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 문화·예술인을 담당한 국정원 요원들이 영화계 동향 파악을 위해 영화인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주 문화체육관광부가 만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제도개선위)에 가서 지난 정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지난 정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밝혀져야 한다.
정지영 감독지난 9년 동안 국정원이 영화인들을 사찰할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2011), (2012)를 연달아 연출했고, 다큐멘터리 (2013)를 제작하며 활발하게 작업하다 어느 순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이것도 그(국정원 활동)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투자가 잘되지 않았던 건 내가 흥행 감독이 아니니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나를 불편해한다’ 같은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6월2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2017)도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심사에서 떨어졌다. 그 결과를 보고 내가 블랙리스트에 속한 감독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신껏 일해왔는데 권력에 미운털이 박혔다. 그것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다만,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우리(영화인)는 지금까지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워나갈 것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는 올랐지만 국정원이 따로 만나자거나 연락해온 적은 없다. 지난 정권에서 한국 사회의 각 분야를 대상으로 국정원 사찰이 전방위적으로 자행됐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영화에 투자하고, 만들라고 독려한 건 단순한 사찰을 넘어선 일이라 할 수 있다. 국정원이 (2013)에 관심을 보이며 제작 진행을 파악했던 일이나, 한국벤처투자의 한 전문위원이 모태펀드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그러나 ‘화이트리스트’를 이렇게 독려했다는 것은 처음 들었고 매우 놀랍다. 얼마 전 업무를 시작한 문체부 제도개선위와 국정원 TF팀이 영화산업에 개입한 국정원 활동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감독이 무려 52명에 이른다는 건 그만큼 영화계를 장악하기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그게 인사권을 통해 조직을 철저히 장악했던 공영방송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거나 정권과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배우와 스태프를 A·B·C등급으로 분류해 관리해왔다는 정황이 있었다. 대기업의 정권 눈치 보기인지, 아니면 청와대나 국정원이 이 문건을 토대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국정원이 블랙리스트 문건을 작성해 영화계를 사찰했다는 사실이다. 새 정부는 이것을 철저히 조사·수사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에는 다수의 독립영화인이 포함돼 있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다. 이명박 정부 초기, 독립영화인들이 수많은 성명과 입장을 발표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2008년 ‘촛불 섹션’을 별도로 신설해 작품 공모도 진행했다. 그 까닭에 2009년 대규모로 실시된 시민사회단체 감사에서 표적이 됐다. 실제 감사를 받는 동안 ‘촛불’에 상당히 집착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별 내용이 없으니 실망하는 듯했다. 공개된 리스트에는 한국독립영화협회, 서울독립영화제,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강릉씨네마떼끄, 대구독립영화협회 등 주요 활동가 이름이 나열돼 있다. 수집 경로가 어떠하든 독립영화에 대한 노골적인 배제로 읽힌다. 이명박 정부는 여러 방식의 공격을 통해 독립영화를 초토화하려 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강한섭 위원장 시절 독립영화라는 말을 지우고, 비상업영화라는 말로 대체하려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9년부터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정권의 반대자로 분류된 영화인과 영화단체의 리스트가 작성됐고, 리스트에 든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과 배제가 있을 것이라는 게 소문의 내용이었다. 2009년 영화단체와 영화제에 대한 감사원의 표적 감사가 진행됐다. 강한섭 위원장 체제의 영화진흥위원회는 독립영화 전용관과 영상미디어센터의 사업자를 교체했고, 조희문 위원장 체제의 영진위는 이창동 감독의 시나리오에 0점을 주었다. 유인촌 장관의 문체부는 2010년 독립영화 제작지원 사업 폐지를 시도했다.
이번에 밝혀진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는 ‘좌파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영화계를 옥죄었고, 탄압했다. 화이트리스트를 급하게 만들어 얼토당토않은 지원을 강행했다. 더 많은 것이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바로잡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 때 영화인들이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민주노동당 지지 등 시국선언에 많이 참여했다. 영화인들의 시국선언 참여는 이전에도 많았다. 참여정부 땐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다. 어쨌든 당시 시국선언 참여자 조직 일을 했다. 그래서 광우병 촛불집회 때 영화진흥위원회 직원들도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적 있다. 집회 이후 시국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영진위 직원들이 징계받는 것을 지켜보며 시국선언 참여를 독려할 때 자기 검열을 하게 됐다. 내가 피해를 보는 건 괜찮지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까.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이 ‘엔터팀’을 따로 운영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국정원이 영화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특정 종류의 영화를 만들려 했다는 발상 자체가 대한민국을 30~4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일이다. ‘댓글부대’를 운영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심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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