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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설득은 힘이 없었다.

등록 2017-09-14 02:09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강원도 대관령에 십수 년째 즐겨 가던 칼국숫집이 하나 있다. 대학 시절부터 이 집을 오갔는데, 당시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고 몇 년이 지나자 칼국숫집 할머니는 갈 때마다 “어째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물었다. 질문처럼 보였지만, 핀잔이고 설득이었다.

할머니,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드나들었으니 나도 할머니의 사정을 대강 안다. 칼국숫집은 살림집과 붙어 있는데,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고 할머니 혼자였다. 한두 해쯤 아들 부부가 등장했고 며느리가 칼국숫집 일을 거들었지만, 얼마 안 가 부부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그 부부의 아이이자 할머니의 손자일 아이만 남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꼬물꼬물 돌아다니던 아이가 고등학생쯤으로 컸다. 아이에게는 지적장애가 있다. 할머니 일을 조금씩 거들긴 했지만 또렷이 의사소통하기는 어려웠다. 모습을 감춘 아들네 부부는 돈 벌러 도시로 이사한 듯했다. 어린 손자가 할머니 키를 훌쩍 뛰어넘게 크자, 할머니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삶의 피로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할머니의 삶이 조금만 덜 고단해 보였어도, 아이를 낳으라는 지청구를 좀더 쉽게 웃어넘겼을지 모르겠다. 혼자 아들을 기르고 이제 또 장애 있는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를 세상이 좀 거들어줬어야 한다. 할머니에겐 손자를 맡길 곳이, 아니 아들 부부에게 아이를 맡길 다른 곳이 있어야 했다. 아이를 사정에 맞춰 교육할 곳이 있어야 했다. 할머니는 존경스럽지만, 존경이 큰 만큼 할머니의 설득은 힘이 없었다. 이 글을 쓰다보니 “할머니, 도망치고 싶은 적 없으셨어요?” 문득 물어보고 싶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칼국숫집에 가지 않는다.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아이 낳으라는 설득과 맞닥뜨린 게 족히 100번은 넘는다. 권유하는 경험을 자신이 겪지 않은 사람의 설득은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여성으로서 아이를 낳고 길러보지 않은 사람의 “아이를 낳으면 좋다”는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한 여성이 설득하면 나는 걱정과 두려움을 털어놓는데 그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등장한다.

내 걱정이 현실과 다르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힘들지만(잠은 잘 못 자지만/ 일 욕심은 버려야 했지만/ 커리어는 포기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정말 예뻐.” 나는 그들의 말을 믿는다. 아이가 주는 기쁨이 지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갓난 조카를 처음 안았을 때의 뭉클함만도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애써 구성한 현재의 일상을 포기할 정도로 마음이 옮겨가지는 않았다.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저출산 해소에 엄청난 예산을 쓴다지만, 올해 합계출산율은 1.03명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새로운 일을 해보라고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일에는 트레이드오프(trade off)가 따르기 마련이다. 잃는 것은 늘 구체적이고 생생한 데 비해 새로 얻을 것은 미지의 것이라 상상에 기대야 한다.

구체적인 손해, 추상적인 이득

그렇기에 새로운 일을 감행하도록 설득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새로운 일의 기쁨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너무 큰 것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것. 어린이집을 구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아동수당이나, 다녀온 뒤가 더 걱정인 육아휴직을 제공한다는 것만으로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없다. 아이 없는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게 설득하고 싶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앞쪽이 훨씬 짧아져야 한다. 뒤쪽엔 그로 인한 행복을 ‘당장’ 자신의 삶에서 보여주는 엄마가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덜 고단해야 한다.

20대 후반, 대개 30대 초·중반까지 아이 없는 일상을 구성해온 사람들에게 아이 낳는 일이 당연한 ‘도리’가 아니라, 잃는 것과 얻는 것을 셈할 새로운 시도임을 인정해줘야 한다. 설득의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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