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총수가 사상 처음으로 구속되는 ‘역사적 사건’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제1146호 표지이야기 ‘이재용의 삼성 삼죄’ 참조).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 1월16일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13일 이재용 부회장을 소환조사한 뒤 사흘간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부회장의 혐의는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등에게 433억여원의 뇌물을 줬다는 것이다. 회삿돈을 빼돌려 후원금을 보냈다는 횡령 혐의, 최순실의 존재를 몰랐다고 국회 청문회에서 거짓 증언을 한 위증 혐의 등도 적용됐다. 이규철 특검 대변인은 “국가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부 언론과 경제단체 등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삼성의 ‘피해자’ 주장 통했다
삼성그룹 총수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삼성의 ‘방패’가 특검의 ‘창’보다 강했다. 삼성은 “뇌물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지원”이었다며 ‘피해자’라고 호소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나 경영권 승계에 관한 부정한 청탁은 없었다”고도 주장했다. 1월19일 법원은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14시간여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 머물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뇌물죄 성립 요건인 대가 관계나 부정한 청탁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 (삼성이 최순실 등을) 지원한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싸고 다툼의 여지가 있고, 현재까지 수사 내용 등에 비춰볼 때 구속 필요성과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1월19일 새벽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내놓은 이유다. 1월18일 오전 10시부터 영장실질심사 4시간, 오후 4시부터 자료 검토 18시간 등 총 22시간 동안 ‘오랜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이다. “증거인멸 및 도주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밝혔다.
특검 수사는 고빗길에 접어들었다. 특검이 앞서 청구한 구속영장은 모두 8건이었다. 이 가운데 영장이 기각된 것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해 직권남용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 대한 1건뿐이었다.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나머지 3명의 구속영장은 모두 발부되고, 김상률 전 수석만 실질적 관여 정도가 적다며 기각됐기 때문에 수사에 큰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는 다르다.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박 대통령이 받는 혐의 가운데 뇌물죄는 가장 죄질이 나쁘고, 형량이 높은 범죄행위다. 앞서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최순실을 기소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직권남용과 강요죄를 적시했지만, 뇌물죄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다. 특검팀은 수사 시작과 함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관여한 국민연금공단을 압수수색하고, 국민연금공단에 삼성물산 합병 찬성을 지시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1호’로 구속하는 등 뇌물 수사에 주력해왔다.
특검팀 여러 겹 덫을 놓았지만…특검팀이 이재용 부회장을 구속하기 위해 구속영장에 이중 삼중의 ‘덫’을 쳐놓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검팀은 삼성이 최순실 모녀에게 승마 지원금 명목으로 약속한 213억원은 뇌물공여 혐의를,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204억원과 최순실의 조카 장시호가 운영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한 16억여원은 제3자 뇌물공여 혐의를 적용했다.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입증이 중요한 제3자 뇌물죄와, 대통령으로서 ‘직무 관련성’이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경제공동체’라는 입증이 중요한 (포괄적) 뇌물죄 가운데 어느 한쪽만 인정되더라도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전략을 짠 셈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최지성 부회장(미래전략실 실장)과 장충기 사장(미래전략실 차장),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대한승마협회 회장) 등은 불구속 수사하기로 한 것도 다분히 전략적이었다. 총수 구속으로 경영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일부의 우려를 사전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읽혔다.
그런데 법원은 특검팀의 덫을 피해갔다. 뇌물공여 혐의 자체에 대한 특검팀의 소명이 부족하다는 ‘실질적’ 판단을 내린 것은 물론이고, 이후 재판 과정에서 뇌물죄를 둘러싸고 벌어질 법리 공방도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뇌물수수 혐의를 받는 박근혜 대통령을 조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뇌물을 준 이재용 부회장을 먼저 구속하는 게 순서상 맞지 않다거나, 삼성전자의 최순실 지원(8월)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7월) 이후에 이뤄진 일이므로 ‘대가성’이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돼온 특검팀 수사의 허점을 건드린 셈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이 뇌물에 해당하는지도 법조계 안팎에서 논란이 이는 대목이다.
이규철 특검 대변인은 1월19일 “법원의 영장 기각 결정은 매우 유감이다. 영장 기각 사유를 면밀히 검토한 뒤 흔들림 없이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영장 기각과는 무관하게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의심되는 SK 등 다른 기업에 대한 수사도 벌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검이 앞으로 내밀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수사 내용을 보강해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거나, 이 부회장을 불구속 기소하거나 둘 중 하나다. 특검은 일단 최지성 부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이재용 부회장 대신 최 부회장을 구속할 여지를 열어둔 것이다. 1월20일에는 최순실씨를 뇌물수수 공범 혐의로 21일 소환조사하고, 불응할 경우 체포영장을 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법원의 영장 기각으로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최순실을 불러 다시 맞추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규철 대변인은 20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 여부는 특검팀 내부에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최지성 부회장 등 3명에 대한 불구속 수사 원칙도 아직 그대로다. 다만 추후 수사 상황에 따라 달라질 여지는 있다”고 말했다.
특검팀은 ‘블랙리스트’ 등 다른 수사에는 여전히 속도를 내고 있다. 20일에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휘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됐다.
법률가들의 릴레이 노숙농성1월19일부터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팀 사무실에는 특검을 응원하는 선물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영장을 기각한 법원을 향한 비판 목소리는 높아지는 분위기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페이스북에 “이재용 구속 요청은 ‘여론재판’이 아니다. 이재용이 불구속 상태에 있으면 삼성의 조직적 힘이 작동하면서 실체적 진실이 계속 은폐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업범죄, 조직범죄에서 수장의 구속 여부는 통상의 개별적 범죄를 범한 개인의 구속 여부와 달리 판단해야 한다. 조의연 판사는 이 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법원에 항의하는 법률가들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권영국, 이덕우 변호사와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은 1월20일 기자회견을 열어 “특검은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하고 법원은 영장을 즉각 발부해야 한다”며, 설 연휴 전인 1월25일까지 릴레이 형식으로 60명 이상의 법률가들이 노숙농성과 거리강연 등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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