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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돌려막기

학부형 성폭행 사건
등록 2016-06-14 15:38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이후 여성혐오, 그리고 혐오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경찰은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결론 내렸고 이를 근거 삼아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여성 대상 폭력, 여성혐오라는 이슈가 정신질환자·장애인 혐오로 ‘돌려막아’진 것이다.

전남 신안군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다.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자마자 일간베스트저장소 등 인터넷 커뮤니티 일각에서 “또 전라도냐”라는 ‘지역드립’이 튀어나왔다. 문제는 이런 인식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나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이들 상당수도 사건이 일어난 섬마을 전체를 극악무도한 범죄 소굴로 낙인찍었다.

어느 진보 인사는 페이스북에 전체 공개 글로 이렇게 썼다. “주민 전체를 악마로 몰아 모두가 기피하고 저주하는 섬으로 만드는 데 동참하려 한다. 이 사건 이전 섬노예 사건만으로도 이미 신안군에서 일어난 악행은 몇몇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조 속에 만들어진 오래된 악습이다. 신안군 출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묻는다. 모두가 자기 책임으로 생각하여 자정 노력을 하시라. 부모형제를 감시하고, 이웃을 감시하고 행정기관을 감시하시라.”

한마디로 ‘그 섬마을이 미개해서 저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뭣이 중헌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가 집단 성폭행을 저질렀는가? 남성 3명이고 그중 1명은 과거 다른 지역에서도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다. 쉽게 말해 그는 신안군 섬마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능히 성폭행을 시도할 수 있는 남성이다. 그러므로 “주민 전체를 악마로 몰겠다” “모두가 기피하고 저주하는 섬으로 만들겠다”는 사람에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서울에서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을 때, 왜 당신은 서울 시민 전체에게 연대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까?’

분명한 건 사건의 ‘가해자-원인’은 명확한 의도를 지닌 남성 3명이지, ‘교사와 학부형의 술자리’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성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모든 조건을 합쳐도 성폭행의 직접적 원인이나 이유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걸 인정할 경우 우리는 ‘여자가 밤길을 혼자 돌아다니니 성폭행을 당하지’ 같은 망발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섬마을이 윤간한 게 아니라 남성들이 윤간했다. 물론 그 남성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더 쉽게 만든 공간적·문화적 특성이 있으면 즉시 시정해야 한다. 거대도시와 작은 섬마을의 평균적 성인지 수준은 다를 수 있다. 세대, 교육 등 여러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심부에 비해 주변부가 각종 범죄에 더 취약하다면 중심부의 자원을 더 투여해 교정할 일이지 지역을 혐오하고 단죄하고 게토화할 일이 아니다. 문제를 특정 지역(의 낙후성) 혐오로 대체해버리는 것은 그저 ‘혐오의 돌려막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 정서에 일조하고 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분노는 대상으로 다가가게 만든다. 비난이든 보복이든 교정이든 어쨌든 주체는 대상과 만나야 한다. 혐오는 다르다. 주체를 대상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리려 한다. 후지고 열등한 것이 날 더럽힐까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주체와 대상의 분리’, 이것이 혐오의 특성이다. 문제를 자꾸만 타자화하려 하기 때문에 혐오는 근본적이고 성찰적으로 문제 해결이 어렵다. 우리는 시골을 악마화하고 지역민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을 맡겨두어선 안 된다. 사건에 분노하고 함께 개입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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