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는 근사한 거울이었다. 한국 사회 특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첫판에서 이세돌 9단이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불계패를 당한 데 이어 2, 3차전까지 연이어 패하자 사람들의 놀라움은 분노로 바뀌었다. 언론은 ‘애초부터 불공정한 대결이었다’고 거품을 물며 기사를 쏟아냈다. 전문가라는 이들이 방송과 신문에 출연해 알파고와의 대결이 이세돌에게 얼마나 불공정하게 세팅되었는지를 강변했다.
돌연 이세돌은 음험한 초국적 기업에 치욕을 당하는 억울한 피해자가 됐다. ‘구글이 한국의 순진한 바둑 천재를 속여서 마케팅에 이용했다’는 서사가 웹에 확산됐다. 이세돌과 구글의 계약이 처음부터 사기에 가까웠다는 설도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구글이 처음엔 인공지능과의 대결임을 숨긴 채 이세돌에게 서명을 받았고, 나중에야 상대가 인공지능임을 알렸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이세돌이 인공지능과의 대결임을 알기 전에 서명한 건 ‘비밀 엄수’ 서약이었다. 아마 구글의 기업 비밀에 해당하는 사항을 이세돌이 인지하게 된 데에 대한 일종의 안전장치였을 것이다. 이세돌은 자신과 바둑을 둘 상대가 인공지능임을 알고 결심했고, 최종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물론 이 대결에 의문을 품을 수는 있다. ‘알파고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가’도 이야기해볼 만한 주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음모론적 주장은 무지의 소산이거나 혹세무민일 뿐이다.
애당초 인간이 아닌 존재와 인간이 바둑을 두는 것부터가 비대칭적 구도다. 20년 전, 체스 챔피언과 IBM 슈퍼컴퓨터 ‘딥블루’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결과가 안 좋자 ‘불공정’ 운운하는 것은 졸렬한 트집 잡기거나 ‘국뽕’(지나친 애국주의를 조롱하는 속어)의 표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이 이긴 4차전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 <nhk> 기자가 던진 질문이 날카로웠다는 평가가 제법 많았다. ‘알파고도 실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학처럼 사람 생명이 걸린 일에 적용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이 질문은 날카롭다기보다 진부하며 자칫 위험천만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인공지능이 실수하지 않는다면 인간 생명을 다루게 해도 되는가? 혹은 발달한 인공지능/로봇의 실수 확률이 인간/의사의 실수 확률보다 낮다면 어쩔 텐가? 문제를 ‘퍼포먼스’의 차원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기술적 완성도는 차라리 부차적이다. 중요한 지점은 오히려 법적·윤리적 책임 같은 측면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양극을 오가며 공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공포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끝내 우리 모두를 지배할 것이라는 두려움. 이는 종족적 휴머니즘, 즉 인간이 가장 우월하며 존엄한 존재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닿아 있다. 다른 하나는 냉소다. 인공지능이 지배해도 멍청하고 썩어빠진 정치가가 지배하는 지금 세상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시니컬한 인식. 이는 종족적 휴머니즘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생산력중심주의 또는 공리주의적 사고의 자장 속에 있다.
인공지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인류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생산력은 이미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높아졌는데 인류의 비참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알파고가 던지는 궁극적 질문은 이런 것들이고 이는 결국 ‘소외’에 관한 물음이다.
알파고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상황을 환기시킨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하나의 참혹한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소외시키기 이전부터 인간은 철저히 소외되어왔다는 사실, 인공지능 따위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왔다는 사실.
뜨거운 일주일 동안 숱한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구글을 비난하고, 이세돌을 찬양하고, 인공지능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것 없다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는 인공지능 산업에 뛰어들겠다고 호들갑이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알파고가 던진 궁극적 질문엔 별로 답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 ‘생각 없음’이 인공지능보다 훨씬 더 두렵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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