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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당·신·은·우·리·들·의·빛

대책위, 송전탑 반대 투쟁 10년 기록 담은 백서·사진집 발간 “우리는 지지 않았다” 새로운 10년 투쟁 다짐
등록 2015-12-24 14:50 수정 2020-05-03 04:28
12월17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10주년 기자간담회’. 폭력적인 송전탑 건설에 신음하다 세상을 등진 주민 2명과 백남기 농민을 위해 참석자들이 묵상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12월17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10주년 기자간담회’. 폭력적인 송전탑 건설에 신음하다 세상을 등진 주민 2명과 백남기 농민을 위해 참석자들이 묵상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밀양이 돌아왔다. ‘밀·양·당·신·은·우·리·들·의·빛’. 연대 활동가들이 한 글자씩 새긴 손팻말을 들어 만든 이 문장과 함께 밀양이 돌아왔다.

12월17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취재기자보다 작가·활동가가 더 많이 모인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투쟁 10년을 돌아보고 미래를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자리에 함께한 주민 10여 명을 대표해 이남우(71)·구미현(65)·김영자(58)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들의 육체는 늙었으나 육성은 카랑카랑했다. 지난 10년 싸움의 회억·억울·울분·분노가 되살아났다(제1084호 표지이야기 ‘항소이유서-밀양 10년 투쟁을 기록하다’ 참조).

“온 마을을 둘러싸고, 마을 앞을 가로막아가면서 철탑 69개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밀양 할매·할배들은 지지 않았습니다. 거짓은 언젠가는 멸망하고 진실은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전, 정부 책임자들은 빠른 시간 안에 밀양 할매·할배한테 사과드려야 합니다. 생명과 재산 피해를 연차적으로 해결할 계획을 세워서 실행하라 이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바보스러운 삶을 살기 싫습니다. 피눈물 나는 싸움의 현장이, 참된 역사가 있었던 사실 그대로 백서에 담겨 있습니다. 많이 보십시오.”(이남우)

“정부·한전, 할매·할배들에게 사과해야”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살던 대로 이대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에 뭐 해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농사짓고 이대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집 바로 뒤에는 송전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 송전탑은 오만하고 방자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밀양에 행한 모든 과정이, 계획에서부터 그 모든 과정이 오만하고 방자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전제주의 방식이었습니다. 저 오만방자한 송전탑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저것이 무너져내리는 날까지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야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 내미는 손을 잡고, 절대로 놓지 않고 끝까지 잡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손잡고 다시 10년을 싸워갔으면 좋겠습니다.”(구미현)

“우리도 사람인데 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정말 힘든 순간에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일제 때 독립운동했던 어르신들… 앞서서 독립운동하던 분들이 잡혀가거나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나서서 싸우고 또 다음 사람이 나서고… 그래서 독립이 될 수 있었다고요. 어디 날 받아놓고 독립운동했겠습니까. 우리들 싸움은 이긴 싸움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이 진 싸움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지금 있는 원전도 수명이 다하면 폐쇄되도록 운동에 동참하겠습니다. 여러분들, 함께 하입시더!”(김영자)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두툼한 책 2권이 공개됐다. 와 . 백서는 이계삼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대책위) 사무국장을 비롯해 모두 17명이 집필했다. 2005년 12월5일 첫 주민 시위부터 2015년 12월까지 만 10년의 기록이다. 655쪽에 이르는 백서의 첫머리에는 ‘헌사’와 함께 주민 302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백서는 그들을 “거짓과 회유, 분열과 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오신 자랑스러운 이름들”로 호명했다. 이들 193가구 302명은 여전히 한국전력이 유혹하는 개별 보상금의 수령을 거부하고 있다.

주민 302명, 한전 보상금 수령 거부

백서 1장(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약사)은 10년 투쟁을 1~6기로 나눠 약술했다. 2~4장은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에너지 정책과 인권침해, 공동체 침해의 관점에서 조명했다. 마지막 5장에는 주민들의 법정 최후진술과 농성장 일지, 육필 편지와 탄원서, 미술작품과 웹자보, 팻말과 펼침막 도안을 가지런히 모았다. 밀양 송전탑 관련 논문의 목록도 따로 추렸다. 백서와 함께 밀양 송전탑 관련 기록은 부산대 ‘SSK 로컬리티 기록화사업팀’이 만든 웹사이트(mta.localityarchives.org)에서도 자세히 볼 수 있다.

백서가 삼단 같은 여인의 머리처럼 검고 촘촘한 활자로 밀양 10년을 빼곡히 채웠다면, 사진집은 밀양 주민들의 삶과 투쟁, 그리고 다시 삶을 이어가는 현장을 생생히 보여준다. 수확한 대추를 상자에 담는 할머니의 환한 웃음을 담은 컬러사진과 밭 한가운데 서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 사진집의 처음과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지난 10년은 투쟁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진실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날 대책위는 새로운 10년을 준비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돈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 철탑을 뽑아내고, 핵발전소를 이 나라에서 몰아내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실’과 ‘정의’입니다.” 대책위가 내놓은 5가지 활동 계획은 이렇다. 초고압 765kV 송전선로로 인한 피해 감시와 한전·정부에 책임 추궁. 에너지 3대 악법(전원개발촉진법, 전기사업법, 송·변전설비 주변 지역의 보상 및 지원법) 개정 운동. 전국 초고압 송전선로와 핵발전소 주변 주민들과의 연대. 밀양 마을공동체의 주민 화합. 자본과 국가 폭력에 신음하는 이들과의 연대. 대책위 공동대표인 김준한 신부는 “마지막 철탑이 뽑히는 날까지 어르신들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10년 싸움의 고통은 여전히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2008년부터 최근까지 밀양 송전탑 투쟁과 관련해 모두 383명이 입건됐다. 이들 가운데 주민·활동가 69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집행유예(14명)와 벌금형(39명) 선고가 잇따랐다.

밀양 주민 첫 무죄판결 확정

지난 12월10일에는 의미 있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기소된 주민 가운데 처음으로 무죄판결이 확정된 것이다.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기소된 강아무개(41)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강씨는 2013년 11월19일 경남 밀양시 단장면 96번 송전탑 건설현장 진입로에서 경찰의 출입을 막기 위해 설치된 대나무 울타리를 경찰이 제거하려 하자 울타리에 매달렸다. 끌려나가던 강씨가 몸부림을 치다 경찰의 얼굴을 발로 한 차례 걷어찼다는 게 기소 이유였다. 1심 재판부는 강씨의 행위가 소극적인 저항행위에 불과한데다 형법(제20조)에서 정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고 항소심과 대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12월26일 밀양에서는 송전탑이 지나는 4개 면 주민들이 마을별로 행진을 벌인 뒤 삼문동 문화체육회관에 모여 문화제를 연다. 그들은 매일 외치고 있다. 그들은 지지 않았다고 소리치고 있다. “밀양 주민들은 이미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승리할 것입니다.” 빽빽할 밀(密), 볕 양(陽). 눈물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곳, 밀양이 돌아왔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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