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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면 출세하라?

개천의 분노
등록 2015-08-25 15:30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정치인 자녀들 취업 청탁 및 ‘갑질’ 논란으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새정치민주연합과 새누리당에서 각각 한 명씩이다. 두 국회의원의 자녀가 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였다. “현대판 음서제”라는 말이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시대”라는 탄식도 함께였다. 많이 듣던 얘기다.

차별과 특권에 대한 분노는 사회정의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런 분노가 넘치는 사회라 해서 곧 윤리적인 사회인 건 아니다. 이른바 ‘인터넷 자력구제’나 ‘인터넷 여론재판’의 성행은 얼핏 정의로워 보이지만 실은 사회의 기능 부전을 보여주는 명백한 신호다. 차별과 특권이 그만큼 만연해 있으며, 윤리적·문화적·제도적 압력이 그런 부조리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사회에서 갑을 향한 분노는 일종의 ‘이벤트’가 된다. 누가 이런 천인공노할 갑질을 했다더라, 하면 다들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각자의 정의감을 한껏 과시하지만 차별과 특권을 차단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이내 잊히고 만다. 비슷한 갑질과 비슷한 폭로가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반복될 뿐이다.

차별과 특권은 사실 불법적인 취업 청탁 같은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법과 제도에 녹아들어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구현하고 있다. 쉽게 말해, 체제는 이미 강자에게 유리하게 세팅되어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극명하게 보여주듯, 법과 제도가 정의롭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강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사람들은 이런 현실 때문에 갑질을 욕하면서도 스스로 갑이 되고 싶어 한다. 갑질을 당한 경험은 차곡차곡 축적되는데 대개 그건 차별과 특권을 시정해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는 과정이 아니라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강자의 철칙을 뼛속 깊이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만약 갑이 되어 갑질을 할 상황이 되면, 자신이 욕하던 그 갑들과 똑같은 행태를 보인다. 그동안 을로 받은 굴욕과 원한을 다른 을에게 되갚아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댄다. ‘야, 나니까 이 정도지 딴 놈 같았어봐, 아휴.’

‘개천의 분노’가 이렇게 ‘갑이 되지 못한 을의 원한 감정’이 돼버리는 원인은 체제 모순에 대한 집단적 해법을 상상할 수 없거나 지레 포기해버린 탓이다. 집단적 해법을 제외시킨 순간 남는 건 개별적 해법과 상상적 해법이다. 개별적 해법은 쉽게 말해 출세해서 ‘갑’이 되는 것이다. 상상적 해법은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 등 사회적 희생양을 만들어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는 것이다.

그럼 앞서 언급한 집단적 해법은 무엇일까?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정치’다. 정치는 차별과 특권에 대한 분노를 법과 제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뿐만 아니라 정치는, ‘갑’과 ‘용’이 되지 못한 사람들,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한명 한명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용’과 ‘용이 못 된 자’로 나뉘는 사회는 실패한 사회다. 기성세대가 한국을 그런 사회로 만들어놓았다. 유튜브 창업자 스티브 첸은 2012년 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태어난 대만이나 한국은 한번 실패하면 영원히 실패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디어가 완벽해질 때까지 계속 생각만 합니다.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실질적인 스타트업이나, 혁신과 진전이 없습니다. 엔지니어 인적자원이나 교육받은 사람들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문화의 차이인 것 같아요. 실패를 받아들이는, 또 실패한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가 다른 것이죠.”

소용돌이처럼 부와 권력이 집중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정점을 지향한다. 그런 사회의 욕망은 집요하지만 진부하며, 역동적이지만 획일적이다. 다양한 삶의 기준, 여러 가지 욕망이 공존하며 존중받는 사회가 좀더 진보적인 사회다. ‘용’이 아니라도 행복한 사회, ‘개천의 분노’가 다다를 종착지는 그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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