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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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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와 사내 A

등록 2015-07-18 19:00 수정 2020-05-03 04:28

이제 막 노년으로 접어든 사내 A는 과거의 어떤 시간을 그리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방역도 좋지만, 이걸 알아야 해. 우리나라가 이렇게 먹고살게 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둘 다 술에 취해 있었고, 메르스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보릿고개를 넘어 시장통으로, 누군가의 취미생활로 흘러갔다. 시장에 가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애절한 줄 아느냐? 솔직히 그 녀석이 색소폰 부는 것도 웃기는 짓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에게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물었다. “나는 딴 거 없어. 먹고살면 그걸로 된 거야.” 그는 행복에 대해서라면 생각해본 적이 없거나 오래전에 포기해버린 사람처럼 말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넘을 수 없는 벽 너머의 사람들

나는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여러 가지 말을 생각했다.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 대형 기업 병원 감싸기, 전염병 관리 매뉴얼의 안일한 적용, 과거 사스의 방역 모범 사례…. 그러나 말들은 입 속에서만 부글거렸다.

그즈음 우습게도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를 읽게 되었다. 주인공 레이버는 이발사와 곧 있을 선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는 1940년대 미국 남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레이버에게 이곳은 ‘가혹한’ 땅이다. 레이버가 민주당 후보를 찍겠다고 말하자 이발사는 곧장 그를 ‘검둥이 옹호자’로 낙인찍고 시대착오적인 견해를 쏟아낸다. 레이버가 “나는 검둥이 옹호자도 백인 옹호자도 아니”라고 주장해봐야 말이 통할 리 없다.

집에 돌아와 ‘바보 같은 대화’를 되새기던 레이버는 절치부심 반박의 연설문을 준비한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마음만 먹으면 나는 이발소 사람들 모두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어.’) 그러나 이발소에서 그것을 낭독했을 때 그는 모두의 비웃음을 샀을 뿐이다. 흑인 종업원에게조차도. “내가 여러분의 우둔한 정신을 바꾸려 한다고 생각합니까? (…) 내가 여러분의 무지에 간섭하려는 것 같습니까?” 마지막, 흥분한 레이버는 말한다. 그리고 이발사에게 주먹을 날린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을 사이에 둔 사람들을 요즘 너무 자주 보게 된다. 레이버 같은 꼴을 당할 바에야 택시기사의 말에 귀를 막는 것이다. 일베 꼴통, 가스통 할배, 퀴어 퍼레이드의 ‘개독’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벽 안쪽에 들어앉아 끼리끼리 대화하면 그만이다.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걸까. 세월호 사태 때,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이 부모님을 만나기 두렵다고 고백했었다. 그들이, 사람도 아니라고 손가락질한 이들과 같은 종으로 판명날까봐 무섭다고.

상당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보는 영역으로 진입하면, 진보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인간다운’ 사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쉽사리 누군가를 ‘무식하다’거나 ‘덜 문명화됐다’고 단정하고, 선 밖으로 밀어내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지적·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이들을 보면, ‘불통’은 청와대에 들어앉아 있는 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내 언행은 어떻게 그 과정에 가담하는가

“이념은 서로 다르지만, 건배!” 사내 A가 술잔을 높이 들었다. 나는 불콰해진 얼굴로 그와 술잔을 부딪쳤다. 그러면서도 그를 어떤 말로 설득할까에 대해 줄곧 생각했다. 치미는 울화를 억누르며 나는 기껏 이런 단어를 떠올렸다. ‘deprograming’ ‘unlearning’(김찬호 ). 짜인 프로그램을 해체하고, 배운 것을 지워 백지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과 감각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를 해부하고, 내 언행이 모욕적인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성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째서 저 사내를 앞에 두고 이런 글줄이나 떠올리고 있나? 그는 방금 전의 대화 같은 건 모두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이번호부터 ‘노 땡큐!’의 새 필자로 기자 출신이자 객원기자로도 활약할 이로사씨가 합류합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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