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이름은 신문과 방송매체들의 ‘머리띠’(헤드라인)를 꿰찼습니다.
이름을 풀어봅시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입니다. 영어로는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입니다. 말 그대로 아시아의 인프라, 즉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은행입니다. 이름엔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 견줘 발전 여력은 충분하지만 낙후한 아시아 지역의 도로, 항만, 철도, 발전소 등 사회간접시설에 투자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이 은행이 지구에서 가장 힘센 두 국가인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의 상징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 은행은 아직 출범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10월 중국과 인도·파키스탄·몽골·베트남·스리랑카·네팔·오만·쿠웨이트·카타르·싱가포르·베트남·라오스·필리핀 등 21개 나라가 모여, 이 은행을 출범시키자는 약속인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이 현재까지의 경과입니다. 이제 3월 말까지 창립 회원으로 참가할 국가를 확정짓고 올해 말께 정식 출범할 예정입니다.
아시아의 각 지역에 도로도 뚫고 철로도 놓고 발전소도 지으려면 종잣돈이 필요합니다. 중국은 이 은행의 초기 자본금으로 500억달러를 내놓고 ‘물주’가 됩니다. 우리 돈으로 약 56조3100억원입니다. 여기서 갈등의 싹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은행이 목표로 한 총자본금은 1천억달러입니다. 이 금액의 절반을 중국이 부담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담’이란 표현이 썩 적절한 것은 아닙니다. 부담을 많이 진 만큼 이 은행의 의사결정에 더 큰 목소리와 권한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금융기구 안에선 ‘1달러 1표’란 말이 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내면 더 많은 입김을 넣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중국 주도의 국제금융기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총자본금 1천억달러를 채워도 중국의 지분이 50%가 됩니다. 나머지 국가들이 몇십%의 지분을 지녀도 중국에 필적하긴 힘듭니다. 중국이 자국 주도의 국제금융기구를 만든 것은 미국 중심의 국제금융기구에서 좀체 영향력과 지분을 키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아시아개발은행(ADB)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계속 지분 확대를 요구했지만 현재 지분은 각각 5.5%와 4%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을 둘러싸고는 중국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게 됩니다. 물론 중국은 부인합니다. 중국 관영 언론들은 “이 은행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와 아시아 각국 모두에 이로운 것이다. 의사결정은 투명하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우려를 가장 강하게 표명한 국가는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은행 등에 도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은 듯합니다. 가뜩이나 중국의 부상으로 ‘주요 2개국’(G2)으로 불리는 것이 마뜩잖은데 자신들이 꽉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제금융 질서에 중국이 도전장을 내미는 형국이니 말입니다. 미국은 “의사결정이 투명하지 않을 것이다. 기존 세계은행은 그 나라의 통치 정당성이나 환경 파괴 여부 등을 세심하게 따져 투자했지만 이 은행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기준에 미달해도 개발 이익에 치중한 투자 결정을 할 것이다”라며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한국, 일본 등 친한 나라들에게 이 은행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미국의 우려에는 이 은행이 아시아 지역 경제주도권을 쌓으려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발판으로 활용될 것이란 판단도 있습니다. 일대일로 사업이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요 국정 과제로 추진하는 전략으로 해상 실크로드와 육상 실크로드를 연결해 중국의 경제력이 아시아·유럽·아프리카까지 이어지게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지난해 말 기준 3조8400억달러에 이르는 보유 외환을 이 사업에 쏟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이미 400억달러에 이르는 실크로드 기금도 만들었습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당나라 시기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의미도 이 이름 속엔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대일로 국책사업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실과 바늘처럼 상호보완적 관계로 보입니다. 미국은 일대일로 사업에 지역 맹주가 되려는 중국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반면 중국은 그건 오해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일대일로는 결코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에 대한 대응 전략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아시아 회귀 전략(또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란, 북한 핵 문제와 동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등의 틈새를 이용해 끊임없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중국의 부흥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대외 전략을 말합니다. 당 기관지 는 평론에서 “일대일로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영향력을 유럽에 이식시키는 계기가 됐던 ‘마셜플랜’과 같은 정책이 아니다. 이 정책은 모든 국가가 평등하고 공존하며 공동 번영하자는 목적에 따라 추진되는 정책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려를 불식해 분위기를 타고 더 많은 국가를 가입시키자는 의도가 보이는 대목입니다.
여하튼 미국의 설득은 약발이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맹방인 영국은 서방의 주요 국가로는 처음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줄을 이어 가입 의사를 밝혔습니다. 중국의 투자는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아시아 건설 시장은 그 수요가 2020년까지 연간 8천억달러에 이른다고 추정될 만큼 무궁무진합니다. 설계와 플랜트 건설 분야 등에서 강점을 지닌 유럽 기업들로서는 군침이 돌 수밖에 없습니다. 동맹의 의리보다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것이 합리적 선택일지 모릅니다. 지금 대세는 중국 쪽으로 기운 듯한 분위기입니다.
중국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3월18일치 관영 는 사설에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을 둘러싼 게임에서 조화를 강조한 중국이 투쟁을 중시한 미국에 승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중국은 모두의 공동 번영을 위해 이 은행을 설립했고 많은 나라가 이에 동의했다”면서 “언젠가는 미국도 이 은행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유와 자신감이 보이는 언급입니다.
미국 눈치에도 가입 줄 서는 서방
이제 남은 것은 한국의 선택입니다. 이미 중국 쪽에서는 시진핑 주석을 비롯한 주요 관리들이 ‘참여해달라’는 메시지를 한국 쪽에 보냈습니다. 중국 매체들은 “정치적 망설임 탓에 경제 발전의 호기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망설이는 나라들을 재촉합니다. 한국의 경제 분야 위정자들의 분위기를 보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 가져다줄 경제적 이익과 가능성에 구미가 당기는 듯합니다. 곤혹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무게추는 가입 쪽으로 기우는 듯합니다. 한국의 늦은 결정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처지의 어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베이징(중국)=성연철 특파원 syche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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