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이 8월26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 복귀를 결정했습니다. 복귀 시점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복귀하면 노사정위는 4월8일 이후 대략 5개월 만에 다시 협상 테이블을 열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밀어붙이는 ‘노동시장 구조 개편’도 탄력을 받게 됐네요. 박 대통령은 집권 3년차인 올해 하반기 최대 과제를 노동시장 구조 개편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진행된 이슈여서 따라잡기가 힘듭니다. 또한 이슈의 프레임이 ‘대기업·공공부문 노조의 이기주의 대 노동을 개혁하려는 정부·기업의 싸움’으로 짜여 있어 많은 노동자와 청년 세대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합당한 걸까요?
정부와 기업 “정규직 특권 없애자”노사정위가 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구조개선특위)를 꾸려서 이른바 ‘노·사·정 대타협’을 추진한 건 지난해 9월19일입니다. 정부가 “노동시장 이중 구조를 개선하고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며 정규직 보호를 합리화하겠다”며 밝힌 ‘경제혁신 3개년 계획’(2014년 3월)의 일환입니다.
정부와 사용자가 추구하는 노동시장 구조 개편의 핵심은 ‘과보호되고 있는 정규직의 특권을 없애자’는 명제입니다. 이를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 구조와 격차 해소 △저성과자에 대한 일반해고 등 고용유연성 제고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을 핵심 쟁점으로 내세웁니다. ‘임금피크제 도입’ 역시 노동시장 이중 구조와 격차 해소라는 의제를 표면화하기 위한 첨병 같은 쟁점이었습니다.
이 쟁점들을 하나씩 따져보려 합니다. 우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 구조와 격차 해소’를 위해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2월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기간제와 파견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35살 이상이면 본인이 원할 경우 고용 기간을 현재 2년에서 최대 4년으로 늘리고, 32개 업종에만 허용된 파견 노동의 범위를 55살 이상 노동자와 고소득 전문직 등에 대폭 확대하는 내용입니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유도하겠다’며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비정규직 보호법’을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노동계는 당시 기업이 2년의 사용 기간이 끝난 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해고하고 말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제도 시행을 강행했고, 2007년 당시 570만3천 명이던 비정규직은 8년 만에 30만9천 명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이번에 이 사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걸 ‘정규직-비정규직 격차 해소’ 대책이라고 내놓은 겁니다. 대신 보완책으로 4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쓴 뒤 정규직 전환을 하지 않으면 2년 연장 기간 동안 임금 총액의 10%를 이직 수당으로 지급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말한 비정규직 임금 월 130만5천원을 적용하면 2년 연장 기간을 다 채울 경우 이직 수당은 313만원에 불과합니다. “기업들로선 비정규직을 마음껏 쓰고 이직 수당을 지급하는 편익이 훨씬 크다”(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연구교수)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입니다.
비정규직 대책 비판받자 ‘임금피크제’ 띄워이런 모순을 안고 있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노사정위 내부 공익위원들조차 부정적인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정부와 사용자는 올해 초부터 다른 프레임을 제시했습니다. 그 프레임에 사용된 제도가 임금피크제입니다.
2016년부터는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노동자 정년이 60살로 연장됩니다. 정부와 사용자는 이를 계기로 ‘기성세대 정규직이 임금피크제를 통해 양보하고 희생해야 청년 고용 문제가 풀린다’고 말합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모든 기업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18만2339개의 청년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유관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도 모든 기업에 임금피크제가 도입되면 29살 이하 정규직 노동자 31만 명을 신규 채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습니다. 노동계가 양보해야 청년 일자리가 생긴다는 논리의 통계적 근거지요. 이 논리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다수 전문가들이 이 통계가 과도한 추산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경총과 한국경제연구원의 추산은 ‘모든 기업의 모든 노동자가 60살까지 일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 가운데 정년 이전에 조기퇴직한 노동자의 비중은 67.1%입니다(김준 국회 입법조사처 환경노동팀장).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장(박근혜 정부 초대 노동부 장관)이 대표 저자로 2010년 낸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근로생애 연구‘라는 논문을 보면, 한국 노동자의 퇴직 연령은 평균 53살입니다. 정년 60살을 채울 수 있는 공공부문과 일부 대기업 생산직은 전체 노동자의 8%도 안 됩니다. 8%도 안 되는 노동자를 100%로 추산하는 통계가 얼마나 허구인지 알 수 있지요.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이 소수라면 그 정도는 양보하고 다른 걸 얻어내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주장은 협상 카드로 유용할까요. 아닙니다. 협상 대상인 정부와 사용자 쪽에서 진보 진영 일각에서 ‘양보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오히려 한술 더 뜬 양보를 공공연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죠.
법망 벗어난 ‘더 쉬운 해고’ 요구하는 정부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8월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우리 노동시장도 유연성이 높아져야 한다. 임금피크제는 필연적으로 해야 하며, 아울러 업무 부적응자에 대한 공정한 해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임금피크제는 사실상 양보를 받아냈으니 이제 ‘쉬운 해고‘도 양보해달라는 말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타협적 태도가 가져오는 결과는 늘 이런 식입니다.
정부와 사용자가 노동시장 구조 개편을 위해 내세우는 또 다른 쟁점은 △저성과자에 대한 일반해고 등 고용유연성 제고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입니다. 이는 정부가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서 밝힌 ‘정규직 보호 합리화’에 해당하는 정책들입니다. 이때 ‘정규직 보호를 합리화하겠다’는 말은 곧 정규직 ‘특권’을 줄이겠다는 뜻입니다.
우선 ‘저성과자에 대한 일반해고 등 고용유연성 제고’를 살펴보죠.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노동자 의사에 반하여 일방적으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습니다. 정부와 사용자는 이 법에 따르면 해고가 너무 어렵다며 다른 해고 기준(‘일반적인 고용해지 기준 및 절차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정부와 사용자의 말처럼 한국은 해고가 어려운 나라일까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3년 발표한 ‘개별·집단해고 보호지수’를 보면,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는 보호지수가 2.17로 34개 회원국 중 22위입니다. 집단해고에 대한 고용보호는 30위로 최하위권입니다. 10년 이상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비율은 18.1%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쉬운 해고’를 원하는 정부와 사용자의 요구가 ‘노·사·정 대타협의 핵심 쟁점’으로 지목되는 것입니다.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역시 한국의 기업 환경을 사용자 친화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은 사안입니다. 취업규칙은 사용자와 노동자가 노동시간·임금·신분보장·퇴직수당 등 취업의 조건을 정한 규칙입니다. 취업규칙을 변경하려면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노동자에게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은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기업이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제도를 운용하는 걸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데, 이 장치를 완화하자는 게 정부 주장입니다. 정부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에 드라이브를 거는 이유는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과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해서입니다.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이 조치가 시행되면 노동조합이 조직돼 단체협약이 존재하는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조준모 성균관대 교수)는 것입니다. 제도가 변경돼 취업규칙 변경이 쉬워지면, 상대적으로 노동 환경이 더 불안정한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노동과 복지 등이 더 불리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애초 정부와 사용자가 원하는 ‘노동시장 구조 개편’의 핵심 쟁점 중 하나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중 구조와 격차 해소’라면, 같은 핵심 쟁점끼리 추구하는 방향이 상충하는 이런 정책을 추진해선 안 되겠지요. 아무래도 한국의 비정규직은 중소기업에 더 많이 분포돼 있으니까요.
발언권을 잃어버린 노동계근본적인 문제는 노사정위에서 논의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핵심 쟁점이 정부와 사용자가 원하는 프레임대로만 유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노사정위가 올해 6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노사정위가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한 사안은 정부와 사용자가 핵심 쟁점으로 꼽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 구조와 격차 해소 △저성과자에 대한 일반해고 등 고용유연성 제고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임금피크제 등만 있는 게 아닙니다.
노동계를 대표해 한국노총은 △최저임금제도 개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등이 포함된 비정규직 차별시정제도 개선 △사회안전망 확충 △노동기본권 확대 강화 △사내하도급 축소지향적 규율 등을 적극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노동계는 더 이상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계가 이런 쟁점에 대한 해결책을 노사정위 안(한국노총)과 밖(민주노총)에서 찾길 원한다는 보도를,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노사정위라는 협상 테이블이 정말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구성체라면, 노사정위에서 공식 논의된 안건들 가운데 노동계·사용자·정부 3주체가 각각 협상 카드를 내밀고 타협할 안건을 동등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정부와 사용자가 내세우는 핵심 쟁점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제대로 된 사회적 대타협이라면, 노동계가 임금피크제를 양보하면 정부와 사용자도 ‘사회안전망 확충’이나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등이 포함된 비정규직 차별시정제도 개선’에서 양보할 지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주류 언론은 노동계를 ‘임금피크제조차 양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노동시장 이중 구조 개선과 청년실업 문제를 풀 방법은 뭘까요. 테이블 밖에서는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됩니다. 민주노총은 8월25일 “실노동시간을 연 1800시간으로 획기적으로 줄이면 그만큼 양질의 청년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의당은 8월20일 “근로시간 특례 등 각종 예외 조항을 없애고 법정 근로시간 한도인 주당 52시간만 지켜도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사회적 대타협을 원한다면, 노동계와 진보정당의 이런 요구들도 협상 테이블에 올려서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재훈 디지털콘텐츠팀 기자 na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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