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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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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마주하자 이왕이면 명랑하게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마주 보는
‘명랑 마주꾼’ 우민정씨
등록 2015-03-27 17:07 수정 2020-05-03 04:27

2012년, 서울 마포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주민들이 잇달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0일. 6명이 목숨을 끊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100일에 불과했다. 사건은 연일 크게 보도됐고, 스스로 삶을 등진 이들을 두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을 마주했다. 누군가는 슬퍼하며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누군가는 사건의 발생 원인을 추측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세 잊었다.

주민들이 우선 밖으로 나오도록

우민정(30)씨는 그때 강화도에 있었다. 사회적 기업 ‘노리단’에서 진행하는 지역사회 활동인 ‘강화도는 대학’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할머님의 김장 담그기 비법 같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때 노리단에 소속된 지인들이 마포에서 함께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제안했다.

우민정씨는 연이어 자살하는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소식을 접하고 ‘명랑 마주꾼’이 되었다. 마주꾼으로서의 일은 주민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민정씨는 연이어 자살하는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소식을 접하고 ‘명랑 마주꾼’이 되었다. 마주꾼으로서의 일은 주민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강화도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뒤였다. 마포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관심을 갖기 벅찼다. 그러다 연달아 일어나는 자살 사건을 보면서 고심 끝에 마포로 돌아왔다. 서울시 청년 일자리 허브를 통해 청년 혁신 활동가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공공 일자리를 주체적으로 계획해서 필요한 예산을 지원받는 제도였다. 함께할 인원들을 직접 뽑았다. 이듬해 6명의 청년들과 함께 ‘명랑 마주꾼’이라는 이름으로 영구임대아파트에 터를 잡는다. 명랑 마주꾼의 탄생이었다.

고립감. 민정씨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일어난 연이은 사건들이 고립감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명랑 마주꾼들의 목표는 주민들의 고립감을 ‘마주 보는 것’이었다. 애초에 대단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그럴듯한 수혜를 제공할 계획이 없었다. 그럴 여력도 없었다. 사람들을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우선 한 일이었다. 볕이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말을 걸고, 아파트 곳곳에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명랑 마주꾼들은 주민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잡지를 만들었다. 말벗이 되기도 하고,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쿠폰 개념을 도입했다. 명랑 마주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쿠폰을 인쇄한 전단지를 붙이거나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반신반의하면서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사용할 줄 몰랐어요. 사람들이 되게 많이 물어오시더라고요. 자기랑 이야기 좀 할 수 있느냐고.”

명랑 마주꾼들이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과 어울려 지내기 시작할 무렵, 한 노인이 방에서 홀로 죽은 채 발견된다. 고독사. 굳이 죽음의 명칭을 붙이자면, 고독사였다. 민정씨는 이웃 주민들의 요청으로 그가 지내던 방을 청소했다. 연락이 없던 유족들은 방을 정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필요한 물건을 챙겨갔다. 근처에 사는 한 할머니가 남은 물건 중 쓸 만한 것을 골라내 고물상에 팔았다.

민정씨는 냄새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악취가 진짜 심했어요. 주검을 치운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냄새가 계속 남아 있더라고요. 옷 같은 데는 바퀴벌레도 기어다니고.” 시간이 지나고 명랑 마주꾼들은 너무도 조용하게 종결된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영상을 제작한다. 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역설적으로 정기 상영회를 통해 많은 이들을 찾아갔다.

외로움을 ‘작업’하기 위해서

명랑 마주꾼 활동을 하며 민정씨가 느낀 것은 생각보다 명료했다. 그것은 도시 거주민들의 고립감과 외로움(그리고 대부분 비극적으로 결탁되어 있는 가난)에 탁월한 혜택을 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대신 그녀는 ‘작업’이라는 개념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명랑 마주꾼이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저희가 커다란 경제적 지원을 하려는 것도, 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저희는 다만 표현 방식에 상관없이 어떤 작업들을 통해 도시에 만연한 고립감, 혹은 외로움 등을 적극적으로 마주하려는 것이죠. 거기에는 영상, 에세이, 그림, 음악 등 어떤 매체든 가리지 않고 차용될 수 있고요.”

이후에도 명랑 마주꾼의 이름으로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다. 고독사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여는 한편, 청년 쿠폰을 발전시킨 ‘명랑 수리공’을 도입했다. 명랑 수리공은 방충망 수리 등 간단한 작업을 지원하는 ‘인터넷 쿠폰’이다. 또한 ‘안녕 음악회’를 열고 영상 아카데미인 ‘명랑 여행자’ 행사를 주관했다.

‘명랑 마주꾼’은 영구임대아파트를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명랑하게 뛰어다닌다. 왼쪽부터 다큐멘터리 〈경한 아저씨, 안녕〉 상영회, 마포의 1인 가구를 찾아가 생활수리를 해주는 ‘명랑 수리공’들, 동네에서 여행하며 영상을 찍는 ‘명랑 여행자’ 청년 모임의 다큐상영회. 우민정 제공

‘명랑 마주꾼’은 영구임대아파트를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명랑하게 뛰어다닌다. 왼쪽부터 다큐멘터리 〈경한 아저씨, 안녕〉 상영회, 마포의 1인 가구를 찾아가 생활수리를 해주는 ‘명랑 수리공’들, 동네에서 여행하며 영상을 찍는 ‘명랑 여행자’ 청년 모임의 다큐상영회. 우민정 제공

명랑 마주꾼 이전 민정씨의 꿈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오래전부터 품었던 꿈은 선생님이었죠.” 꿈만이 아니었다. 민정씨는 국문과를 다니며 대학 생활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조기 졸업도 했다. 임용고시를 치를 일만 남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당연히 선생님이 될 줄 알았다고. 부모님도 맏딸이 교사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가질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즈음 삶의 방향을 단번에 틀어버리게 한 것은 학교 선배들이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몇몇 학교 선배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차가 없어도 무단 횡단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 저와는 다르게 기존 질서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선배들이었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선배들과 스터디도 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면서 뭔가 놓치며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는 선배들 따라서 촛불집회에도 참석하게 됐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2008년 광장으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던 그때, 사람들과 광장에서 어울리며 그녀는 사회운동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품게 된다. 이후 학교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성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맥놀이’라는 단체에 한동안 빠져 지냈다.

부모님에게 냉장고를 사드리세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허허벌판으로 나간 것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치자면 부모님도 만만찮을 테다. 그녀는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비법을 공개했다. “냉장고를 사드렸어요. 비싸고 커다란, 그리고 실제로도 유용한 물건을 사드리세요. 그러면 큰 걱정은 놓으시더라고요. 적어도 이 녀석이 먹고살 만하니 사줬겠지 하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물론 그걸 사느라 저는 한동안 금전적으로 힘들었지만 어쨌든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 같아요.”

서울시 청년 일자리 허브에서 시작됐지만 지원 기간은 1년이었다. 이후 작업에 소요되는 비용이나 인건비는 친구들의 ‘재능’으로 해결했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는 파워포인트 강좌를 진행해서, 또 어떤 친구는 교육 커리큘럼 같은 것을 제작해서 돈을 벌기도 했죠. 작년까지는 그렇게 월급을 같이 벌어서 나눴어요.” 서로의 재능으로 번 돈을 나누는 ‘재능 나눔’이었던 셈.

“근데 사실 지역 일이라는 게 잘 안 되거든요. 문화예술 활동이나 청년사업 같은 일을 받아서 협업해서 하고, 안 할 때는 또 흩어지고 이런 식이었는데, 어려울 때도 많았어요. 인원이 너무 늘어서 소통하기가 어려워지고, 인건비를 마련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그렇게 해서 지난해에는 빚을 지기도 했다. “빚을 갚으려고 다른 일도 많이 했어요. 올해는 좀 다르게 해보자고 해서 1인 반찬 가게 같은 수익모델도 생각하고 있어요.”

빚을 떠안으면서도 이 일을 계속 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피로감이나 고단함을 해소해주는 원동력 같은 것이 따로 있을까?

“물론 이런 일을 해도 일반 회사에서처럼 성과에 대해 압박을 받아요. 가끔은 제가 부품같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이 일을 이렇게 참아가면서 해야 하나 할 때도 있어요. 또 기획서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복잡한 행정적 절차에 시달릴 때면 정말 힘들죠. 많은 분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면서 인건비가 나오느냐고 물어보세요. 그때마다 답답하죠. 하지만 좋은 것도 있어요. 우선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워요. (웃음) 그리고 제 일을 제가 기획해서 하는 건 정말 좋더라고요. 원동력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실 그냥 삶의 터전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하는 일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필요하다면 공공자금이든 후원금이든 물꼬를 터서 끌어오는 힘 같은 게 생긴 것 같아요.”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또래의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젊은이답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천천히 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처음에는 생각한 대로, 또 계획한 대로 하고 싶고 뭔가 커다란 사회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그런 확신과 조급함이 오히려 소통을 막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일종의 자기 증명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지나보니, 천천히 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글 김광희 제6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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