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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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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맑게 뜬 삶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밥·눈물·땀 나누며 연대한 울산과학대와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50대 노동자들… 물러설 곳 없는, 물러설 수 없는 이들의 새로운 삶
등록 2015-06-05 14:21 수정 2020-05-03 04:28

농성장 먹거리가 풍부하긴 힘들다. 거리에서 천막 치고 사는 삶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의 농성장은 여름에는 가자미 물회가 나오고 날이 쌀쌀해지면 과메기가 등장하는 곳이다. 농성장을 찾는 손님들 배곯게 하지 않겠다는 억척스러움이 있다. 그 억척스러움을 주도하는 이는 ‘선이 이모’(김선이·58).
그녀의 밥을 최근까지 매일 먹던 사람들이 있다. 조선소 하청업체 남자들. 사정은 이러하다.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KTK선박)에서 일하던 100여 명의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체불임금도 퇴직금도 사장이 들고 사라졌다. 일명 ‘먹튀폐업’. 사람들은 직영인 현대미포조선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두 달째, 5명이 남았다.
미포조선 농성장에선 비닐 한 장 머리에 덮을 수 없다. 경비들이 달려든다. 비 오고 바람 불면 가까운 울산과학대 농성장을 피난처로 찾았다. 먹거리 풍부한 울산과학대 농성장에서 한두 끼 얻어먹었다. 그게 시작이다. 같은 시대를 다른 삶을 안고 걸어온 50∼60대 노동자들이, 길거리 농성장에서 무릎을 맞대고 밥 먹는 사이가 됐다.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김선이씨와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 김영배씨. 두 사람은 1년째 지속되고 있는 청소노동자들의 파업 농성장에서 서로 만났다. 민주노총 울산본부 제공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김선이씨와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 김영배씨. 두 사람은 1년째 지속되고 있는 청소노동자들의 파업 농성장에서 서로 만났다. 민주노총 울산본부 제공

그렇게 무릎을 맞대고 밥을 먹었다

활달하지만 속내는 부끄럼이 많은 선이 이모, 붙잡고 사는 이야기 좀 듣자고 했더니, “한 게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애 셋만 키웠다 한다.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하니, 틈틈이 부업도 했다고 한다. 조금 더 물으니 조선소 하청 일부터 떡볶이 장사까지 했다. “난 놀 적에 놀고 일할 땐 일하고 그랬어. 참 알뜰하게 살았지.”

오해하지 말자. 놀았다는 것은 집에서 살림을 하고 육아를 했다는 말이다. 착한 남편 만나 없는 살림에도 알뜰히 살아온 그녀의 삶이 슬슬 나온다.

“21살에 결혼했지. 22살에 큰애 낳고, 24살에 둘째, 25살에 막내를 낳지. 중매로 한 거야. 그땐 다 그랬어. 우리 집 오빠들이 아저씨(남편) 총각 때 만나보니 이 정도면 여동생을 맡겨도 되겠다고 했지.”

그녀의 고향은 경남 거제도. 고향 사람을 소개받고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 뒤 남편과 “별로 미워하는 것 없이” 살았다. 다만 생활이 곤궁했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이 남편은 동생들 키우느라 총각 때 번 돈을 다 썼다. 심성 고운 선이씨는 불만도 없이 내 가정 지킬 생각만 했다. 공장에도 나갔고, 식당에도 나갔다.

이 일 저 일 하다보니 “선이가 시집가서 말이나 하겠느냐” 하던 오빠들의 걱정은 옛말이 되었다. 순둥이 같은 성격이 사라졌다. 오빠만 위로 4명, 언니 하나에 아래로는 남동생 셋. 남자 형제 많은 집에서 오빠들이 ‘시키는 대로’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집을 지켰다.

결혼하기 전까지 도시에 나가본 적도 별로 없었다. 결혼을 하고 부산도 가고 서울도 갔다. 남편은 ‘노가다’도 하고 배도 탔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 셋이 태어나 엄마에게 올망졸망 매달렸다. 서울 생활 3년째, 수해민이 됐다. 물에 다 떠내려갔다. 세 들어 산 처지라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체육관에서 며칠 지내고 움막 같은 임시 거처에서 살다가 안 되겠다 싶어 오빠들이 있는 울산으로 내려왔다.

조선소에서 근무하던 오빠들을 따라 남편도 조선소에 취직했다. 애를 키우고, 틈틈이 돈을 버는 생활이 울산에서도 반복됐다. 남편의 벌이가 나아지고, 그래서 같이 번 돈으로 아파트 하나 살 수 있었던 것은 ‘87년’ 때문이었다. 현대 계열 회사의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중심지였던 울산.

“무서웠지. 눈도 코도 못 뜨고, 따가워서. 남자들은 맞기도 많이 맞았지. 시위에 나간 사람들이 최루탄에 눈을 못 뜨면 우리가 다라(대야)에 물 떠다가 주고 그랬지. 그때는 다 하니까. 그랬기 때문에 아무래도 임금이나 이런 게 좀 나아졌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잖아. 2007년에 파업을 했기 때문에 지금껏 있지. 안 그러면 다 쫓겨났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한다 했어”

2007년은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해다. 친한 친구가 울산과학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와보니 엉망이었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공산주의도 그런 공산주의가 없었다”. 반장인 경비에게 출퇴근 때마다 인사하러 가야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안인사’라 불렀다. 때마다 떡값, 회식비를 모아줘야 하는 윗사람이 많았다. 청소노동자는 11명인데 담당 교직원까지 합치면 관리직만 6명이었다. 다들 문안인사를 받으려 했고, 뭐라도 얻어먹으려 했다.

“나는 못한다 했어. 당당하게 내 일만 잘하면 되지. 경비 아저씨 그런 사람에게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한다고 했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매번 싸우고 억울해하는 가운데, 지금 울산과학대 지부장인 김순자씨가 들어왔다.

“순자 언니가 활발하잖아. 튄다고 미움이 간 거야. 언니가 넘 서럽지. 나도 그땐 친하지 않았어. 그래도 지부장 언니보고 ‘언니야 더러운 게 돈인데,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겠지. 참읍시다’ 하며 그렇게 왔지. 그래가지고 오다가 보니, 이 선까지 왔네.”

파업 1년까지 왔다. 착한 남자 만나 산 38년처럼, 지난 1년도 후딱 지나갔다고 한다. 정신없이 시간만 갔다. 최근 농성장 처지가 달라지긴 했다. 먹거리가 풍부하던 농성장이 철거됐다. 임시 천막을 세우고 라면으로 연명한다.

끼니나 해결할까 해서 왔던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이제 밥도 못 주는데 농성장을 떠나지 못한다. 오히려 대학이 고용한 젊은 경비들에 의해 나이 든 몸이 다쳤다.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늘어났다. 못 떠나는 이유를 물으니 연민, 의리, 흔한 감정들이 대답으로 나온다. 그런 감정들 때문에 조선소 하청노동자 김영배(52)씨도 갈비뼈가 부러졌다.

영배씨의 삶을 바꾼 것은 1987년. 선이씨가 말한 무섭던 때였다. 그는 20대 청춘이었다. 도시로 와 일하는 부모 대신 어린 동생을 돌봤다. 똑똑했으나 공부에 흥미를 느낄 새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가니 실습비 명목으로 번번이 돈을 요구했다. 학교를 포기하고 돈을 벌러 집을 떠났다. 경북 포항에서 시작한 첫 직장은 엉망이었다. 화장실만 가도 ‘조인트’를 까고 쥐어박고 체벌을 했다.

“잘못된 걸 아는 게 힘든 거예요”
생활임금을 요구하는 자신들의 파업을 알리기 위해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은 대학 교정과 거리에서 선전전을 진행한다. 민주노총 울산본부 제공

생활임금을 요구하는 자신들의 파업을 알리기 위해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은 대학 교정과 거리에서 선전전을 진행한다. 민주노총 울산본부 제공

당시 영배씨는 혈기왕성했다. 우람했던 몸으로 체벌에 반항했다. 사람들은 술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 여겼던 젊은 사람이 관리자에게 대드는 모습을 신선하게 봤다. 87년이 되고 노동조합 건설이 한창이던 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연락책이었다.

“저는 어용이 뭔지도 몰랐어요. 신문에 어용이라 나오는데 저는 ‘오용이 뭔데?’ 그랬죠. 노동조합을 세우는 과정이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거 같고. 밖에서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보다 이게 재미있네. 노동조합이 생기니 사람들이 할 말을 하고 사는 거예요.”

공부가 필요하다 느끼고, 야학을 찾았다. 거기서 공부를 하고 소모임 학습도 했다. 새로운 지식과 진실이 그를 흥분시켰다. “얼굴이 벌게졌어요, 설레서. 한마디로 멍했죠.” 그는 노동운동이 하고 싶었다. 노동운동 단체에서 일도 하고, 한진중공업 언저리에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운동은 그에게 실망을 안겼다. 집으로 돌아갔다. 병세가 위독한 아버지가 그를 붙잡고 말했다. “죽기 전에 너 결혼하는 거 보고 싶다.”

한 달 만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가정이 생겼다. 돈을 벌어야 했다. 울산 조선소로 갔다. 죽을 맛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게 너무 힘들데요. 아는 게 힘든 거예요. 잘못된 걸 아는데 말 못하고. 한쪽 눈 감고 살아야 하는 거더라고요.”

눈감고 사느라 몸이 휘청거렸다. 한번은 조선소에서 쫓겨났다. 부당해고를 당할 위기에 처한 동료를 위해 직영 현대중공업의 부서를 찾았다. 따졌다. 부장은 선택을 하라 했다. 이 사람들을 내보낼까, 아니면 김영배씨 혼자 나갈래. 그 혼자 나갔다.

“밤마다 술로 살았어요.” 그때부터 살이 빠지고, 위가 아팠다. 직장에 매이지 않으면 사는 게 편할까 해서 사업도 했다. 빚만 1억원 넘게 지고, 가정이 무너졌다. 그 와중에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병실 커튼만 젖히면 바로 앞에 영안실이 있는 거예요. 내가 언젠가 저기 누워 있겠다 싶으니까, 너무 억울한 거예요. 내 20년은 어디다 버린 걸까. 살아야겠다.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보고 싶다.”

괴로워 술만 마시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살아야 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도시락을 하나 싸들고 산에 다녔다. 헤어졌던 아내가 돌아와 자신을 돌봤다. 딸은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을 보여주며 아빠는 내 걱정은 말라고 했다. 가족 때문에라도 살아야 했다.

살았다. 그리고 다시 조선소로 갔다. 병원비로 인해 빚만 늘었다. 벌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장비를 반납하라는 것. 하청업체가 문을 닫는다고 했다. 바로 회사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사장이 도망갔다. 조선소에서 하청업체 폐업은 흔한 일이었다. 몇 달치 임금을 들고 사라진 터라 분노가 더 컸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직영인 현대미포조선이 문제 해결에 나서달라 요구하며 농성한다. 두 달째다.

두 눈 뜨고 사는 삶이 시작됐다

매일 선전전을 하고, 집회를 하고, 울산과학대 농성장을 찾는다. 아내는 걱정이다. 그는 아직 환자다.

“옛날에는 이 정도 체력을 소모했잖아요. 벌써 쓰러졌어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라 설명할 수 없어요. 안에서 치고 나오니까. 아침에 눈뜨면 웬 미친 짓인가 싶어요. 내가 빚이 3천만원이 넘어. 먹고살아야 해. 그런데 나도 모르게 옷을 입고 농성장에 나와요. 나오면 하루가 너무 아쉽고 짧아요. 밤에 들어오면 아이 엄마가 막 잔소리를 하잖아요. 그래도 씩 웃으면서. 잠들기 전에 생각해요. 너무 아쉽다, 내가 좀 건강했으면.”

한쪽 눈을 감고 살아온 20년. 병실에서 억울하다 슬퍼하던 그의 인생이 다른 국면을 맞았다. 두 눈 뜨고 사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거리생활을 하는, 이 눈 맑은 노동자들이 건강하길 바란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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