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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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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사람들 혼자 두지 않으려고

해고노동자 생계비·건강검진비 지원하는 ‘울산지역연대기금’ 대표 맡은 노동변호사 정기호씨
등록 2015-07-24 17:18 수정 2020-05-03 04:28

바르고 착하게 생긴 사람이 변호사라 했다. 그와 친분 있는 노동자들은 무엇이 궁금한지 물었다. “사법고시 그거 어렵다는데 한 번에 붙었습니까?” 질문이 유치하구만, 생각했다. 그러나 나 또한 인터뷰에 응한 정기호 변호사에게 물었다. “공부 잘했지요?” 그는 손사래를 쳤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내 쪽에서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열심히 안 해도 1등 하고 그런 거예요?” 농담이었다. “사회, 역사 이런 과목을 좋아했어요. 역사는 초등학교 때 웬만한 어른들보다 훨씬 많은 상식이 있다고 자신할 만큼 책을 읽었어요. 대학 가서도 역사를 공부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역사학과를 가면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다고 어른들이 그러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시에 제가 문과 과목으로 알고 있는 게 역사, 경제, 법학 정도였어요. 경제는 나한테 안 맞는 것 같고, 법학과에 가야겠다 했죠.”
이런 결심을 한 것이 국민학교 4학년 때. 그는 멋쩍어 “제가 조숙했나봐요” 한다. 10년 뒤, 법대에 들어갔다. 1990년대 초반 학번답게 학생운동을 했다. 제대를 하니 외환위기라며 세상이 변해 있었다.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할까. 취업 문은 좁아졌는데, 강의실이 아닌 거리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덕에 어디 가서 환영받지 못할 학점을 지녔다. 고시 준비를 했다.

2011년 11월 정기호 변호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법률교육을 하고 있다. 정 변호사는 노동자를 변호하고 법률자문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자들의 동료이자 동지 노릇도 했다. 최근에는 투쟁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생계비 등을 지원하는 울산지역연대기금 대표라는 감투를 썼다. 배문석 제공

2011년 11월 정기호 변호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법률교육을 하고 있다. 정 변호사는 노동자를 변호하고 법률자문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자들의 동료이자 동지 노릇도 했다. 최근에는 투쟁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생계비 등을 지원하는 울산지역연대기금 대표라는 감투를 썼다. 배문석 제공

울산에서 메뚜기 한 달, 컨테이너 4년

논리와 역사를 갖춘 법은 다행히 그의 흥미에 맞았다. 사법고시에 붙자, 그는 또 한 번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판검사의 권위가 갖는 보수성이 불편했고, 그렇다고 승소를 장담하며 일종의 영업을 해야 하는 변호사 또한 자신에게 적합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연수원 생활이 끝나고,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 노동조합 법률원(이하 금속법률원)에 들어갔다. 노동변호사가 된 것이다. 노동변호사는, 건조하게 설명하자면, 노동법률 사건을 주로 의뢰받아 다루는 변호사다. 여기에 두 어절 정도 추가하자면, ‘노동자의 입장에서’가 적당하겠다. 이 구절로 인해, 노동변호사의 삶은 다르게 흘러간다.

서울 금속법률원에서 시작한 변호사 생활은 길지 않았다. 일을 배운 지 반년도 되지 않아 그는 울산으로 가야 했다. 당시 금속법률원은 지역마다 법률원을 열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 젊은데다 기혼자가 아니라 몸이 가벼운 사람이 자신뿐이었다. 울산에 오긴 왔으나 사무실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함께 썼다. 노동조합 상근자가 외근을 가면 빈 책상에서 일했다. 한 달 가까이 메뚜기 생활을 하니 안 되겠다 싶었다. 사무를 볼 공간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지만, 상담하러 오는 노동자들의 사생활이 보호되지 않는 게 더 큰일이었다. 법률이라는 것이 딱딱해 보여도 사람 사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법률 상담을 하다보면 의뢰인의 사생활이 언급될 수밖에 없다.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던 처지에 마땅한 대안이 있을 리 없었다. 당시에 법률원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신입 사무장 한 명. 두 사람은 컨테이너를 보러 다녔다. 금속노조 사무실 뒤 공터에 컨테이너를 세워 임시 거처로 쓰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서 4년을 보냈다.

울산에 내려온 해가 2005년, 마침 일용직 하루살이 목숨 취급당하던 플랜트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거세게 싸우던 시기였다. 하루에도 몇십 명의 노동자가 연행되고, 구속됐다. 플랜트 투쟁에 관한 검찰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사무장은 검찰청 가서 종일 복사를 하고, 변호사는 잡혀간 노동자들을 쫓아 경찰서를 돌아다녔다. “그때는 잠시도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죠. 밤새우는 날도 잦았고, 지역 분위기를 익힐 정신이 없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적응하기가 수월했던 거 같아요.”

11년 함께해온 ‘현대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사건

당시에 접한 또 다른 커다란 사건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문제였다. “2003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난 뒤, 2004년 말 노동부로부터 현대자동차에서 사내하청을 쓰는 것이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잔업 거부를 하는 등 목소리를 냈지요. 탈의실 점거 농성도 하고. 두 달 사이에 90여 명이 해고됐어요. 업무방해 등 민사사건도 걸리고.”

그때부터 사건을 담당해, 지금까지 11년이다. 그가 울산에 내려와 변호사 생활을 한 시간만큼이다. 지난해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며 정규직 전환을 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소송을 한 1천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모두 승소했다. 정기호씨 또한 함께한 사건이었다.

“기뻤죠?” 물었다. “기쁘기보다 안도했지요.” 이기면 재판부를 잘 만나서 이긴 것 같고, 지면 자신이 잘 못해서 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단다. 늘 승패를 겪어야 한다. 승부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 때문에 간혹 변호사 일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건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단순한 ‘패’도 아니다. 노동자 인생이 걸린 패소다. 생소한 법으로 해결을 보겠다고 찾아올 정도면, 직장에서 이리 해보고 저리 해봐도 안 되어 오는 것일 경우가 많다. 혼자 마음고생, 몸고생을 하다가 찾아온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을 얻어내는 과정은 길고 지루하다. 아니 지친다. 앞서 언급한 불법파견 문제만 해도 1심 판결을 받는 데 3년이 걸렸다. 어렵게 판정을 받아도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다. 승소를 하면 회사는 항소를 한다.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는 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 몇 년 동안 노동자는 실직자이고 비정규직 처지다.

납득할 수 없는 패소도 겪는다.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근로자지위소송을 한 적이 있어요. 그분들은 원래 현대중공업 전산실에서 일하다가 현대그룹이 전산 업무를 담당하는 외주 계열사를 하나 만들면서 그리로 옮겨가게 된 사람들인데, 말이 옮겨간 거지 일하는 공간도 같고 하는 업무도 같았어요.”

현대중공업 정규직 전산직원들과 한 층에서 칸막이만 사이에 두고 일했다. 하던 업무도 외주업체로 옮기기 전과 흡사했다. 전산직원들은 자신들의 근로소속이 어디인지를 밝혀달라는 소송을 했다. 외주업체는 인력시장 파견업체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독립된 도급업체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불법파견이다. 정기호 변호사와 전산노동자들의 입장이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노동조합 탄압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해 법률적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정기호 변호사. 배문석 제공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노동조합 탄압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해 법률적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정기호 변호사. 배문석 제공

노동자 인생 걸린 ‘승패’ 겪는 직업

“나름 열심히 했는데 1심부터 대법원까지 졌죠. 법원은 이들이 현대중공업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판정했어요. 스무 명 정도가 소송을 시작했는데, 회사에서 재계약을 안 해준다는 협박도 들어오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거의 다 떨어져나가고. 4명이 남아 소송을 끝까지 했어요. ‘나는 잘리는 것도 각오하겠다’ 하는 4명.”

밥줄 끊을 각오까지 해야 법정에 설 수 있다. 재판에 진 사람은 해고자가 된다. 위법자가 되어 구속되기도 한다. 이긴 사람도 여전히 해고자이거나 비정규직이긴 마찬가지일 때가 많다.

법을 안 지 20여 년, 알수록 법이라는 것은 “가진 자가 필요에 의해 만들고, 그것을 힘없는 자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변호사가, 무력할 정도로 법의 한계를 느낀다.

그럼에도 정기호씨는 법정에 선다. 사람들을 복직시키고 억울함을 풀어주려 한다.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법의 처벌을 받게 된 사람들을 변호한다. 그건 싸우는 사람들을 혼자 두지 않는 일이다. 법의 한계를 느낀다는 그는 대중이 만드는 사회운동이 기존 법을 바꿔나갈 것이라 했다. 누군가는 사회운동을 “늘 있던 일을 늘 있었던 일이 아니게 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달라진 인식이 법을 바꾼다. 인식이 바뀌려면 행동이 있어야 한다.

늘 있었던 일들을 바꾸려는 사람들. 정기호 변호사는 그런 사람들을 변호했고, 그 또한 10년 넘게 그런 사람으로 살았다. 지난 10년, 잘 살아온 것 같으냐고 물으니, 그냥 잘 버티고 있다고 한다. “저처럼 사는 변호사는 소수잖아요.” 비주류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버팀이 필요하다.

10년을 그리 살았다. 노동자의 법률자문을 하고 노동자를 변호하고. 법률자문으로 그친다면 일반 변호사와 다를 바 없기에, 의뢰인들과 동료도 하고 동지도 했다. 같이 술 마시고 투쟁 농성장을 찾고, 한껏 쌓여 있는 서류들을 뒤적이다가 법정에 선다. 그런 삶에 요즘 자그만 변화가 생겼다. 감투 하나를 쓰게 된 것이다. 울산지역연대기금 대표.

울산지역연대기금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을 하다가 해고된 이들에게 생계비, 건강검진 등을 지원하는 단체다. 힘을 가진 자들이 주는 절망감에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고 결국 건강마저 잃게 되는 이들을 끌어안고자 하는 단체. 싸우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곳이다.

늘 있었던 일들을 바꾸려는 사람의 편

그가 대표로 추천되었을 때, 나는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변호사는 앞에 내세우기 좋은 직함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역연대기금에 애정을 갖는 이유를 들었을 때, 그가 대표를 맡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재판 수임료로 월급을 받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돈을 번다는 건 투쟁이 있기 때문이고, 투쟁의 과정에서 누군가는 희생자가 되잖아요. 그런 바탕에서 만들어지는 돈이기에 이 돈을 다시 지역사회에 환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어요.”

솔직히 나는 그가 자신의 벌이를 그렇게 인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독버섯을 먹은 이가 있기에, 인류가 식용버섯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굶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음을 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작은 안온마저 그 안온을 위해 행동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 보내려는 정기호씨의 애씀을 존중한다.

그는 적당한 부채감을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함께하는 사람이다.

희정 기록노동자

*‘만인보 2015’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수고해주신 김광희, 장희원, 희정씨, 그리고 연재글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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