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밀양 와서 늙었어요. 옛날 사진을 보면 학생다웠는데.”
그렇게 말하는 어진의 나이가 올해 스물. 학생이었던 ‘옛날’을 떠올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진은 경남 밀양에 왔다. 그리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2013년 10월, 당시 밀양은 꽤 소란스러웠다. 경찰 3천 명이 주둔했고, 마을 뒷산은 공사 현장이 되었다. 하루 간격으로 노인들이 병원에 실려갔다. 어진이 밀양에 도착했을 때, 역 광장은 가증스럽게도 한가로웠다. 어진은 편의점에서 난생처음 담배 두 갑을 샀다. 담배를 가방에 넣고 영남루로 난 길을 걸었다. 영남루 근처에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실이 있다고 들었다.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와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없었다. 송전탑 반대 싸움을 하는 주민들에게 미안해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않았단다.
“2학년 때부터 학교가 다니기 싫어졌어요. 수업시간에 교과서 대신 책을 들고 갔어요. 집에 있는 책을 잡히는 대로 읽다가, 읽으면서 내가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밀양 싸움을 기사로 봤는데, 여기를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했어요. 밀양에 오기 전날, 엄마·아빠한테 말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리는데 (웃음)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딴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가하는 거 같다. 밀양 할머니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같이 느껴진다. 한번 가서 보고 오겠다’고요.”
도시에 전기를 보내기 위해 밀양 땅에 세워지는 송전탑이 있었다.
“간신히 대책위 사무실을 찾아왔는데 분위기가 싸한 거예요. ‘구미에서 왔는데요’ 하고 가만있으니까 ○○ 누나가 ‘바드리’로 가라는 거예요. 가는 길에 본 밀양이 엄청 예뻤어요. 그때는 송전탑이 하나도 없었잖아요. 가니까 산비탈에 할머니들이 앉아 계시고 경찰은 계속 올라오고. 비상식적인 일이잖아요. 사람들이 길에서 울고 밥을 먹고. 거기서 하룻밤을 잤어요. 잘 줄 모르고 침낭 이런 것도 안 챙겨왔어요. 사실 자지도 못했어요. 새벽 4시인가, 경찰이 방패로 우리를 우르르 밀고 들어오데요. 그때 충격을 받았어요. 할머니들이 이렇게 당하고 있구나. 학교에 있을 땐 사람이 자기가 죽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마음이 진짜 아팠어요.”
공사가 시작되는 새벽부터 끝나는 저녁까지 매일같이 주민들과 경찰은 충돌했다. 한국전력 직원을 공사장으로 올리기 위해 경찰은 주민들을 길에서 치웠다. 어진에게 그것은 “머리가 마음을 못 따라갈 만큼 힘든” 경험이었다. 그래도 지낼 만했다. 자신처럼 마음 내어 온 사람들이 있었다. 낮에는 노래를 부르고 수다를 떨었다. 한전이 물러간 밤이면 할머니들과 무릎을 맞대고 고스톱을 쳤다. 그렇게 바드리 농성장에서 2주를 지냈다.
“같이 밥을 먹으니까 식구가 되었는데, 갈 수가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빠지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한번 보고 오겠다던 밀양 농성장을 떠나지 못했다. 어느새 장기 결석생이 되어 있었다. 학교는 어진을 소환했다.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왜 밀양에 갔냐? 반성하냐? 밀양에 다시 갈 거냐?’ 물어서, 저는 만약에 밀양 할머니들이 계속 다치면 갈 거고 또 가면 오래 있을 거다라고 했어요.”
주 임무는 물 나르기, 기록은 12병20시간 청소, 돌아가며 선생님들에게 말씀 듣기, 사자성어 쓰기가 벌로 주어졌다. 방과 후마다 어진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데모는 대학 가서도 할 수 있다. 데모를 하더라도 좋은 대학 가서 해야 한다.’ 마음을 밀양에 두고 온 어진의 귀에 말씀들이 담기지 않았다.
“제가 밴드도 했어요. 축제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학교에 간 날이었어요.”
어진은 밀양으로 돌아갔다. 밀양 주민 한 분이 음독을 한 거였다. 고인은 자신의 돼지 축사가 송전탑 피해 지역 안에 있는데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목숨을 끊었다.
“자퇴서를 내러 학교에 가야겠는데 분향소에 경찰이 계속 계고장을 보내오는 거예요. 자리를 못 비우겠더라고요.”
밀양에 눌러앉았다. 분향소가 없어진 뒤에는 101번 농성장에 터를 잡았다. 단장면 용회마을 뒷산에 위치한 그곳에서, 어진의 주 임무는 물 나르기였다.
“산 아래서 물을 이고 오는 거예요. 제가 기록을 세웠어요. 생수 12병. ○○ 아저씨가 나이도 많은데 자꾸 저랑 경쟁을 하려는 거예요. 처음에는 6병, 7병으로 시작했는데, 하루는 아저씨가 11병을 지고 올라온 거예요.”
산속 농성장에는 물도 전기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 있고 놀이가 있었다. 함께 수다를 떨고 밥을 먹었다. 한전이 공사를 하겠다고 잘라버린 나무 밑동을 의자 삼아 카페를 만들었다. 용식이라는 개도 키웠다.
“농성장 지키라고 둔 개인데 경찰들 올 때는 한 번도 짖지 않는 거예요. (웃음) 즐거웠어요. 상대방이 나를 무지막지하게 때린다 해도, 우리는 즐겁게 싸운다, 이런 마음?”
생수 12병을 지고 올라간 날은 농성장이 강제 철거되기 며칠 전이었다. 정부는 농성장 철거 행정대집행을 고지했다. 마을 주민들은 쇠사슬로 몸을 묶었다. 더는 물 공급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진은 생수병을 짊어졌다. 경찰이 올 거고, 주민들은 연행을 각오했다. 어진에게는 내려가라 했다. 19살 나이를 걱정했다.
“그때까진 제가 두들겨맞지 않은 이상 밀양에서 울지 않았거든요. 밤에 산을 내려오는데 그날은… 주변은 깜깜하지, 공사 헬기 소리가 들리지, 누가 실려가는지 앰뷸런스 소리 들리지, 저 위는 어떤 상황일지 눈에 선하지. 같이 내려가는 사람을 붙잡고 엉엉 울었어요.”
농성장은 철거됐다. 공사는 계속되고 송전탑이 세워졌다. 시험 송전에 들어갔고, 송전선은 타닥타닥 전기 흐르는 소리를 냈다. 머리 위로 전기를 이고도 주민들은 다시 농성장을 세웠다. 그사이 어진은 대책위 상근자가 됐다.
요새는 사진에 관심을 두고 있단다. 6월11일 농성장이 철거된 이후, 밀양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줄었다. 글 쓰는 이도, 사진 찍는 이도. 어진의 카메라가 그 이후를 기록한다. 지금 쓰는 카메라의 전 주인인 친구도 서울로 갔다. 밀양 싸움이 한창일 때 함께했던 또래들은 대학으로, 고향으로 떠났다. 어진은 밀양에 남았다.
밀양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니 있으니 할 일이 생겼다. 올여름에는 마을 빈집을 정돈해 살 계획이다. 농사도 짓고 싶다. 밀양이 누구나 와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은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 밀양은 많은 상처를 가진 곳이 되었다. 송전탑 보상에 합의한 주민과 합의하지 않은 주민들이 갈렸다. 마을은 조각났다. 몇 달에 걸친 한전과 경찰의 폭력은 주민들에게 씻기지 않을 모욕을 안겨주었다. 다친 몸들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저도 좀 날카로워진 것 같아요. 밀양에 처음 와서는 진짜 바보같이 웃었거든요. 요샌 방에 혼자 있으면 무기력하고 싸웠을 때 기억이 자꾸 떠오르고. 그러고 보면 어르신들 대단해요. 얼마나 더 힘드시겠어요.”
그러나 밀양 어른들 자체가 ‘힐링’이다.
“할머니들은 만나면 손부터 잡으시잖아요. 다른 사람들 안아주는 걸 보면 저게 할머니들 힘이구나 해요. 공간 자체가 훈훈해지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을 만나 손을 잡고, 세월호 가족을 포옹하는 할머니들이다. 상처를 입히는 이도 사람이지만, 위로하는 이도 결국 사람이다. 자신의 고통을 뒤로하고 누군가를 위로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진은 1년 반을 보냈다.
“밀양에 오기 전에는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하는 게 힘들었어요.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옆 사람과 같이 잘 살 수 있는 길이 아닌데도, 무언가를 가지고 싶고 사고 싶은 욕구를 다스리기 힘들었어요.”
“나 혼자서는 풀 수 없는 문제예요”타인의 삶을 짓밟고 도시로 온 전기가 밤새 현란한 불빛이 되어 휘청거리는 사회. 그 탐욕스러운 소비를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우리가 있었다. 전기를 사용하는 것이 미안해 먼 길 걸음에 휴대전화조차 들고 오지 못했던 어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심성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좀 다르다. “나 혼자서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안 것 같아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소비하도록 길들여지는 거잖아요.” 이제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책임으로 결론짓지 않는다. 함께 헤쳐나가고 바꿔야 할 과제로 받아들인다. 같이 웃고, 그 웃음을 지키는 데 더 품을 들인다.
어진이 카메라를 들면 주민들은 웃고, 그 웃음은 사진에 담긴다. 활짝 웃는 모습들을 담아 마을 주민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어진은 아직 밀양에서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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