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원(1970년 4월21일~현재)은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겸 영화인이다.’ 한 문장 안에 오롯이 한 사람의 삶을 다 담을 수 있을까. 위키피디아에는 노진원씨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군더더기 없는 딱 저 한 문장이 그를 말하고 있다.
지난 3월3일 서울 혜화동 대학로 소극장에서 배우 노진원씨를 만났다.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에게 배우가 된 계기를 물어보자 “배우가 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배우가 된 게 자연스러웠어요”라고 말했다. 어느새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건넸다. 한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의 자부심 있는 목소리였다. “어릴 때부터 끼가 많았어요. 결정적으로 연극 무대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예요. 지금의 정동 세실극장에서,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만 당시에 김갑수 선배님이 나오셨던 을 봤어요. 순간, ‘무대’라는 것에 사로잡혔어요. 처음 성인극을 보고 나서 아, 무대라는 데는 저런 곳이구나, 여기(현실)와는 다른 굉장히 환상적인 공간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내가 저기에 선다면’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됐죠. 연극 무대라는 공간의 의미에 대해서 느꼈고 배우라는 직업이 참 멋있다, 라고 느꼈어요.”
대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본격적으로 ‘극’에 대해 공부했다. 연극은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해석 속에서 어떤 것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작업이었다.
“배워보니까, 나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비단 연극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같이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다보니 그 속에는 나름의 규율과 질서가 있었어요. 저는 그게 다행히 ‘잘’ 맞았어요. 선배들 말씀도 잘 들었고 열심히 배우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지냈어요. 그렇게 학교 생활을 하다보니 ‘아, 정말 나 혼자서 연기만 잘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구나’라고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러다 1991년, 이미례 감독의 에 원진이라는 방황하는 청소년 역할로 데뷔했다. 대학교 재학 중의 일이었다. “갓 대학교 2학년일 때 일인데, 선배들과 동기들 중에서 제가 그 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운이 좋았어요. 데뷔를 했다고 해서 어깨가 높아지지도 않았고 무조건 감사하게 여겼어요. 이른바 단박에 좋은 작품, 뛰어난 역할에 바로 캐스팅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쉽지 않죠.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노진원씨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하다.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연극계에서도 그의 입지는 굳건하다. 와 , 그리고 롱런하는 에서 배우 박철민과 콤비로 오랜 시간 동안 극을 이끌어오고 있다. 그러기까지 그에게는 인내의 시간, 즉 ‘견디는 시간’이 있었다.
불러주지 않는, 찾아주지 않는
“배우는 누가 찾아주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서 정말 힘든 건데, 진짜 쉽지 않은 건데… 버텨야 해요. 견뎌야 해요. 생업으로 삼으려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잖아요. 왜냐하면 이 일은 수입이 일정하지가 않으니까요. 항상 경제적 불안감을 떠안을 수밖에 없죠.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 일로 내가 당당히 살아갈 수 없다면 그만둬야 하는 게 맞죠. 그래서 항상 아르바이트를 해왔던 것 같아요.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택시 운전대도 잡아봤어요. 그렇다고 해서 주눅 들지도 않았고 아르바이트하는 것에 대한 반문을 가져본 적도 없어요. 오히려 좋았던 게 택시를 몰면서 세상 공부를 했어요. 그게 저한테 차곡차곡 쌓였어요. 배우로서 그만한 좋은 기회가 없죠.”
당당히 배우로 자리잡기까지 인내의 시간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달려왔는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찾아주지 않는다. 그 인고의 시간들. 나이는 먹어가고,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 그 자신도 두문불출할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럴수록 자신의 내면만 파는 것이지,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사람들도 만나보고, 이야기도 듣고 그러다가 없던 일도 생겼다.
“버티는 것도 재능이에요. 저는 그게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재능이라고 봐요. 누구나 그런 시간들을 보내기 마련이에요. 다만 그게 사람에 따라 달라요. 그 시간이 짧거나 조금 더 걸린다, 라는 차이일 뿐이지 누구라도 오래 잡고 있으면 이뤄요.”
재능과 노력은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이 나를 알아주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 것인지가 필요하다. 자괴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고 당당하게 나를 열심히 준비하면 된다. 꼭 배우지망생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 같았다. 취업준비생인 20대 청춘들에게도, 또 다른 자신의 꿈을 위해 준비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끝까지 버텨보라고, 버티는 놈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였다.
인터뷰 처음부터 눈길이 닿은 그의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은 그가 공연 중인 연극 에서도 나온다. 그는 이 연극에서 높으신 그분의 미술관에서 금고를 털려다 실패하는 ‘더 늘근 도둑’ 역할을 맡았다. 극중에서 우연히 예뻐서 주운 리본을 가지고 사람들은 왜 이것을 버렸을까, 라는 대화를 ‘늘근 도둑’과 나누고 관객을 향해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겠지…”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진다. 순간 객석은 조용해진다.
“저는 배우가 공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영향력이 있는 정도라고 생각해요. 배우가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면, 가장 기초적인 카타르시스가 있겠죠. 감정의 배설이죠. 예전에 연기했던 같은 작품의 경우 코미디극이니, 관객에게 활력을 줄 수 있죠.”
그 외에도 그는 항상 사회와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늘 극 속에 그 고민을 집어넣는다. 세상에 일어난 이슈들을 어떻게 집어넣을까 생각하고, 연습해보고, 바로 극 속에서 대사로 녹여낸다. 건강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 해야 할 말은 늘 많다. 에 나온 노란 리본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4월, 너무 충격이었어요. 배가 가라앉는 것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어요. 너무나도 아픈 사고였는데 사람들이 점차 잊어가고 있더라고요. 이건 옳지 못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극 속에 넣어보면 어떨까 하고 넣었어요. 극 안에서도 표현하잖아요.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라고. 다시 한번 우리 모두에게 상기시키는 거였죠.”
그는 단지 사고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직접적 연관이 없더라도, 그 아픔이 직접적으로 내 피부에 와닿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다.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겠지”라는 대사를 집어넣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너무 마음 아픈 일을 코미디극에 소재로 쓴다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럼에도 ‘우리가 차츰 잊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용기를 냈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그 대사를 들은 뒤 잊을 수 없었다고, 너무나 마음에 남았다고 얘기하는 관객도 있었다. 그는 세상에 살고 있는 만큼, 사회인으로 모두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못 본 척하고 묵과할 수 없다. 직접 광화문 앞에 찾아가 1일 단식도 했다.
“저는 단지 하루였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분들이 며칠씩 단식을 하고 계셨어요. 그분들에 비하면 저는 기껏 하루지만, 그 미비한 하루들이 모여 파급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배우니까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녹여낸 거죠.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 대한 나름의 노력이에요. 지금 연기하고 있는 라는 작품도 마침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뼈 있는 코미디니까요. 최선을 다하는 거죠.”
세상에 이야기를 건네는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배우다. 배우라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길 뿐이다. 나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의 가방엔 세월호를 잊지 말자라는 마음을 담은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저는 진짜 제가 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냥 제 길만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에요. 이 정도의 위치에 온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거예요.”
그는 멋쩍게 웃는다. 수줍게 자신을 겸손하게만 얘기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또 어떤 역할로, 어떤 모습으로 세상 앞에 나올지 모른다. 화려한 배우가 아닌, 현실 속에서 세상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배우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그는 배우다’라는 문장만으로 그를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노진원씨는 최선을 다해 역할을 연기하고 ‘세상에 이야기를 건네는’ 바로 그런 배우다.
글 장희원 제6회 손바닥문학상 수상자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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