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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찬조, 참조

등록 2014-10-07 14:24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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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적어도 이 땅에선. “세계적으로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창조경제는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 간의 벽을 허문 경계선에 창조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창조경제는 사람이 핵심입니다. …국내의 인재들을 창의와 열정이 가득한 융합형 인재로 키워 미래 한국의 주축으로 삼겠습니다.” 2013년 2월25일 18대 대통령 취임사의 한 대목이다. 창조의 말씀은 곧 지상의 질서가 됐다. “창조경제를 선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전위부대로 미래창조과학부란 이름의 ‘융합형’ 부처가 등장했다. 다른 부처와 공공기관이라고 뒷짐만 지고 있을 리 없었다. 창조라는 두 글자가 들어간 제목의 보고서와 발표 자료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졌다. 하물며 민간 금융기관조차 느닷없이 창조금융에 매진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녹색금융을 대대적으로 ‘밀던’ 곳이었다. 바야흐로 이 땅은 창조의 신천지였다.

II. 말씀이 있고 질서가 생기자 이번엔 사람이 홀연히 등장했다. 창조의 세상에선 응당 정해진 이치, 였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그들은 창조의 말씀과는 거리가 한참 먼, 한마디로 ‘찬조’ 출연자들이었다. 창조경제의 주역을 맡기엔 턱없이 부족한 깜냥임에도, 이에 굴하지 않는, 하나같이 당찬 성격의 인물들이다. 집권 첫해와 이듬해에 이르기까지 ‘내리꽂힌’ 인물들의 행렬은 좀체 끊이지 않는다. 한 예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창조경제의 주요한 축으로 꼽은 정보기술(IT) 분야와 방송 분야엔 각각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인터넷진흥위원장)과 뉴라이트 출신의 대선 캠프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 무사히 안착했다. 공기업과 금융기관은 물론 각종 단체의 대표 자리에 이르기까지 낙하산과 보은 인사의 왕성한 식욕은 좀체 줄어들 기미가 없다. 세계경제의 패러다임 변화를 상징한다며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창조경제가, 옛 산업화 시대의 전통과 가치를 오롯이 품은 전승자들의 찬조경제로 쪼그라들고 만 배경이다.

III. 말씀은, 아주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찾아오셨다. 9월16일 열린 국무회의 석상에서였다.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도 그 도를 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고….” 말씀은 다시 (뒤틀린) 질서를 낳았다. 사흘 뒤 검찰은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을 꾸렸다. 지난 대선 당시 국가 정보기관이 정치 개입의 무대로 ‘활용’하고 떠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을, 이번엔 사법 당국이 일상적 감시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나 마찬가지였다. 이름에서 군사정권 때의 철권통치를 떠올리게 하는 ‘범정부 유관기관 대책회의’엔 국내의 대표적 모바일 메신저 업체를 비롯해 포털 업체 간부들이 참석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이버 긴급조치’ 시대를 맞아 너도나도 ‘사이버 망명’에 나서는 블랙코미디가 벌어진 이유다.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며, 산업 간의 벽을 허문 경계선에 창조의 꽃을 피우는” 창조경제를, 낙하산 인사들의 엉망진창 찬조경제를 넘어, 억압과 규율, 감시와 통제의 ‘참조’경제로 더욱 망가뜨린 장본인이 정작 자신들임을, 창조경제의 주창자들은 언제쯤 알게 될까. 창조는 멀고 짝퉁만 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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