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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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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꼬라지

등록 2014-04-04 10:51 수정 2020-05-03 04:27

나는야 영화인. 오늘은 헌팅을 가보자. 스릴러 영화라면 가로등만이 외로운 으슥한 골목길이 될 것이고, 멜로드라마라면 조금은 동화 같은 분위기의 주택단지도 괜찮을 것 같다. 휴먼드라마라면 서민의 희로애락이 묻어나오는 리얼함이 오히려 영화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웬걸, 생각보다 헌팅은 쉽지 않다. 가는 곳마다 주차된 차들이 풍경을 막고 있고, 난잡하게 색칠해진 지붕과 간판들은 또 얼마나 시선을 빼앗는지.

차도, 간판도, 전선도 너무 많다

헌팅을 으레 좌절시키는 한국 도시 풍경의 일반적 특징들이 있다. 첫째, 한국은 차가 너무 많다. 단지 차도에 차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다니는 차만큼이나 주차된 차가 너무 많다. 마치 설문대할망이 장난감 차들을 수집해놓은 것처럼, 골목마다 주차된 차들은 항상, 예외 없이, 으레, 줄곧 넘쳐난다. 게다가 차는 어찌나 그렇게 큰지. 하긴 한국 사람들 큰 차 좋아하긴 한다(특히 남성 동지들은 차가 커야 안전성도 있다며, 실용성을 핑계로 삼곤 한다). 촬영하려면 이 차들 다 옮길 거야?(실제로 한 컷을 찍기 위해 차주들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부탁하는 일도 왕왕 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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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한국은 간판이 너무 많다. 안 그래도 글씨가 시선을 빼앗는데, 크기는 좀 큰가. 설상가상으로 흡사 서낭당 도당나무에 치렁치렁 매달아놓은 오색띠처럼. 오색 십이색 난색판이다. 저마다 나 여기 있노라고, 한 번만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잔뜩 차려놓아 형형색색 곱딱해도 정작 손대는 건 몇 찬이 안 되는, 우리나라 밥상 같다.

셋째, 한국 거주지역의 천공을 뒤덮고 있는 건 하늘이 아니라, 전신주의 뒤엉킨 전선들이다. 평소엔 눈에 잘 안 띌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카메라를 로앵글로 들이대면 어김없이 화면을 비집고 들어오는 전깃줄 타래들은, 포청천이 달려들어도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매듭처럼 난삽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과연 정보기술(IT) 강국이로세. 더 신기한 건, 전선 하나하나는 어디론가, 어떤 집으로든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더니, 사연 없는 한국 전선은 없는 게다.

물론 이러한 특징들은, 한국이 겪은 역사적 상황을 몸소 증거하고 있기는 할 것이다. 예컨대 지하에서 건물 내벽을 따라 들어가지 못한 채, 공중에서 계속 덧대어지다가 얽혀버린 전선들은, 도시계획보다 더 빨리 진행된 도시화 혹은 그만큼 더 빠르게 건물을 세우고 부수면서 요동치는 부동산을 증거할 것이다. 또 아우성치는 간판들은 한 점포가 한자리에 꾸준히 머무르지 못하는 한국 상권의 근대적 특징,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해서 증거할 것이고. 하지만 이런 고상한 역사과학적 유추를 일부러 조금만 소홀히 하고서, 거기서 한국인의 민족성을 넘겨짚는다면, 지나친 억지일까? 달리는 시간보다 주차하는 시간이 더 많아도 덩치는 커야 하는 자동차들은 우리네의 허세를 닮아 있다. 옷이 날개인 거다. 그리고 각자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씩 하면서 우글대는 간판들은, 댓글이라면 너도나도 전문가가 되고 비평가가 되는 우리네들의 오지랖을 닮아 있다. 욕 많이 먹어야 오래 산다고, 서로 챙겨주는 걸까. 또 얽히고설킨 전선들은, 모두가 한 가족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경쟁과 암투, 그리고 뒷담화와 호박씨를 감내해야만 하는 우리네 한 지붕 문화를 닮아 있다. 언뜻 보면 모두가 서로에게 언니이고 오빠인 가족주의는, 사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언니이고 오빠가 아닌 실향주의(?)일 수도 있는 게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더니.

허세 입고 오지랖 먹고 세 사는

결국 자동차, 간판, 전깃줄 타래는 한국인 민족성의 의.식.주.는 아닐까. 우리가 허세를 입고, 오지랖을 먹고, 한 지붕에 세들어 사는 것처럼, 우리는 자동차를 입고, 간판을 먹고, 전깃줄 타래에 얽혀 산다. 헌팅하면서 별생각을 다 한다고? 헌팅이 얼마나 좌절되었으면 이러겠나. 그만큼 자동차, 간판, 전선은 우글댄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나도 좀 먹고살자.

김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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