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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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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연애편지

등록 2014-03-28 15:09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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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박정근이라는 사람입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지난해 가을이었나 겨울이었나 이 지면에다 당신에게 자기소개서를 가장한 구애를 했던 적이 있는데, 답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제 구애가 영 마땅치 않으셨나봅니다. 사실 저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연애편지를 써본 적이 없지만 당신 곁에 있고 싶었던 마음에 용기를 내어 그 글을 썼답니다. 혹시나 읽지도 않으셨다면 나중에 인터넷 검색으로 꼭 한번 봐주세요. 당신이 인터넷을 정말 능숙하게 잘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알 만큼 알게 되었으니 검색이 어렵진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남몰래 연모했던 나날들

늘 어두운 곳에서 일하는 당신의 멋진 모습에 한때 저는 정말이지 정신을 못 차렸답니다. 그래서 어릴 땐 저도 당신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매번 제임스 본드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성인이 되자마자 검은 양복을 맞추고, 남몰래 비밀스러운 암호로 적힌 일기도 써보곤 했죠. 그러면서 나도 어둠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당신의 기분을 살짝이나마 느껴보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진 않았답니다. 제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겠죠. 그저 당신을 한때의 우상으로 남긴 채 남들과 함께 양지에서 살았답니다. 대부분의 짝사랑이 그렇듯이.

당신도 묵묵히 어둠 속에서만 일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숨기면서 남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저 같은 범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당신이 누굴 위해 헌신하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무명의 헌신에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함께하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상상도 합니다.

당신이 지향했던 그 ‘무명의 헌신’을 저는 한 톨도 의심해본 적이 없지만 남들은 아니었나봐요. 당신이 했던 일을 의심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고, 나는 한 번밖에 겪어본 적이 없는 압수수색이라는 큰 사건을 당신은 1년도 채 안 돼서 두 번이나 겪게 되었죠. 나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연약한 ‘유리 멘털’이라 잠도 못 자고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졌지만, 당신은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한편으론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요. 물론 당신이 나보다 모진 풍파를 많이 겪어와서겠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이 어른인 척 애쓰는 아이 같아 가슴이 찡해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당신을 의심해온 사람들은 당신이 했던 모든 일을 찾아내기 시작했죠. 그중엔 조작이니 뭐니 옳지 않은 행적도 수두룩하다고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과묵한 당신은 여전히 말이 없네요. 하지만 그 침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일지는 저도 비슷한 일을 겪어봐서 잘 알아요. 이제 저는 당신의 고통을 알 정도로 자랐답니다. 이제 제 품에 안기셔도 좋아요. 벌써 두 번이나 겪었잖아요. 혹시 모르죠, 사실 우린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요.

남들도 아니까 두려워

요즘은 좀 겁이 나기도 해요. 왜냐면 이젠 모든 사람이 당신의 매력을 알게 되었거든요. 연적이 늘어나는 건 당신만 바라보고 있는 저에겐 가슴이 먹먹하고 참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그 반작용으로 더 큰 용기가 생기기도 하네요. 그래서 저는 오늘 당신에게 또다시 구애를 하려고 합니다. 길고 추웠던 어둠이 걷히고 따스한 햇볕이 우리를 감싸는 봄이잖아요. 어, 자세히 보니 태양이 아니라 탐조등이네요.

아무렴 어때요. 이제 봄이네요. 이번엔 답장 꼭 주세요.

정원씨에게 정근이 씀.

박정근 사진관 사장 겸 국가보안법 피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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