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인터뷰 뒤 자신의 인터뷰를 읽은 황상기씨는 조목조목 정리가 잘됐다며 ‘삼성 사람들도 이거 보면 좀 쫄았을 거 같애요’라고 예의 그 순박한 말투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며 정색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어설픈 충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현재 대한민국에서 삼성 문제에 가장 직선적이고 담백하게 맞서는 사람은 황상기씨이기 때문이다. 그런 황상기씨의 힘이 진심과 선의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걸 그간 그의 행적과 긴 만남으로 이미 알게 되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진심과 선의 앞에 어떤 말들은 이미 사족이다.
“내 기사가 사람들 행복하게 해줬나”그런 선의와 진심의 결정체 같은 조직이 제주도에 있다. 제주 올레길을 만들고 관리하는 사단법인 제주올레다. 제주 올레길에는 거품이 없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제주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길을 개척한 이들의 ‘선의’와 걷는 이들의 ‘진심’이 한데 어우러져 ‘행복하고 고맙다’는 말이 걷는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제주 올레길에서 그 외 모든 것들은 사족이다. 제주올레 안은주 사무국장을 만나기 위해 제주도로 갔다. 마이크로소프트 전성기 시절의 비법을 빌 게이츠가 아니라 스티브 발머에게 듣는다면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안은주 국장을 만났다. 그는 그럴 만한 자격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7년 전 시작된 제주올레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길로 우뚝하다. 현재 26개 코스, 452km의 길이로 한 해에 제주 올레길을 걷는 사람만 100만 명이 넘는다. 일본 규슈와 경기도 양평에도 제주올레의 노하우를 그대로 이식한 길이 만들어졌고, 제주 올레길이 지나는 마을과의 활발한 결연사업으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새로운 길 문화가 조성되었다. 제주올레 전 코스를 완주한 사람도 이미 300명이 넘었지만 올레길엔 입장료도 없고 기업 광고나 로고판도 없다. 어떤 선의와 진심이 있었기에 7년 만에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장기 공연 중인 명품 뮤지컬의 백스테이지를 엿보는 마음으로 묻고 들었다.
-언제부터 제주올레 일을 하셨나요.=본격적으로 함께한 건 시작하고 1년쯤 지나서지만 진작부터 연결은 되어 있었죠. 2007년 서명숙 이사장이 길을 내기 시작할 때 저는 기자였는데 사업계획서를 쓴다거나 보도자료를 쓴다거나 후배로서 도와줄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코스는 늘어나는데 돈은 없고, 이사장 가족들이나 제주도 고향 지인들만으로는 힘에 부쳤죠. 무엇보다 후원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는데 실무를 챙길 사람이 없었어요. 급한 대로 제가 휴직하고 최소한의 후원 시스템만이라도 만들어주고 올라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제주도에 왔다가 일을 너무 많이 벌인 거죠. (웃음) 올라가려고 보니 누군가를 심어놓고 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월급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게 이유의 다인가요.=결정적인 건 여기 내려와 넉 달 동안 일하면서 ‘행복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제 지인들도 여기 내려와 걷고 가면서 계속 고맙다, 행복하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아, 내가 기자 생활 하면서 사람들한테 이런 소리를 얼마나 들었나. 내가 쓴 기사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기사를 쓰는 일도 되게 즐거운 일이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저한텐 직접적인 ‘뽕’이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어떤 명분보다도.
-기자 할 땐 그런 경험이 없었나요.=많지는 않았지만 없진 않았을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기사를 써서 억울했던 사람이 좋아졌다거나 그러면 큰 기쁨이죠. 하지만 그런 일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시사주간지 기사라는 게, 필요하긴 하지만 대부분 조지는 기사가 많잖아요. 그때가 기자 15년차였는데 그런 게 많이 힘들었나봐요.
“제주올레에선 나쁜 사람 덜 만나요”- 파업 사태도 영향이 있었나요.=그랬을 거예요. 그 전까지는 평범하게 기자로서의 삶과 그 일만을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길거리 파업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거 같아요. 그 전에는 그냥 취재원 대 기자, 이런 개념이었다면 파업 뒤에는 세상에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그런 걸 실감했죠. 그러다 을 창간하고 1년쯤 지난 시점에 제주올레 일에 관여하게 된 거죠.
-개인적으로 제주올레의 어떤 점에 그렇게 끌린 건가요.=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데 여기 제주올레에서는 나쁜 사람을 덜 만나요. 제가 생각하는 정말 나쁜 사람은 뭐냐면요, 나쁜 결과를 불러오거나 나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밥벌이를 위해서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너무나 의연하고 태연하게 사실처럼 행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제 에너지를 빼앗기는 느낌이에요. 근데 제주올레에서는 나쁜 사람 스트레스를 거의 안 받거든요. 제주올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선 외려 에너지를 받죠.
-제주올레가 뭔데요.=제주올레는 걷는 길이고 함께하는 길이죠. 다음이나 네이버가 인터넷 세계를 연결하는 하나의 플랫폼이 된 것처럼 제주올레도 일종의 플랫폼이라고 생각해요. 이 플랫폼 위에서 굉장히 많은 콘텐츠와 모델과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었고 앞으로도 만들어질 겁니다. 중요한 건 이 플랫폼으로 돈을 벌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초창기에 저희가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엄청 벌었을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 돈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예요. 운영비만 있으면 된다, 일할 수 있는 돈만 있으면 된다. 애당초 목표가 그거였어요. 올레길을 통해서 직접적인 수익을 얻지 않으니까 주민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고 걷는 사람들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죠. 제주올레에 오는 사람들은 뭔가 좀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오세요. 그러니까 제주올레에는 선한 에너지가 넘쳐나는 거예요.
‘선한 에너지’라는 말이 화살처럼 와 박혔다. 그런 에너지가 충만한 길을 걷는데 선해지지 않을 도리가 있나.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내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단순히 돈 문제에 국한된 개념은 아니겠죠.
=제가 제주올레에 선한 에너지들이 모인다고 한 이유 중 하나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 이 길을 내는 사람들이 정말 고생했겠구나’ 그런 걸 안다는 거예요. 올레꾼들이 ‘고맙다. 행복하다’ 얘기를 많이 해서 짐작만 했지 처음엔 잘 몰랐던 거 같아요. 초창기부터 길을 내는 자원봉사를 오래 한 오빠가 있어요. 자기 땅 한 평 없이 남의 땅에 농사짓고 나무 심고 그러는 분이에요. 그분이 어느 날 이사장이랑 제게 꼭 할 말이 있다면서 자기가 올레 자원봉사를 하면서 일이 무척 잘 풀리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며칠 전에, 자기 형편으론 너무 비싸 살 엄두를 내지 못하던 묘목값이 절반으로 뚝 떨어져서 그걸 사서 심었는데 자기한테 어떻게 이런 행복한 일이 생겼을까 생각해보다가 알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기가 낸 길을 걸으면서 ‘이 길을 내준 사람이 고맙다, 고맙다’ 그런 말을 하도 많이 하니까 그 얘기가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이 자기를 돕는 거 같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엄청 울었어요.
‘뽕 맞으러 밖에 나갔다 와라’그 말을 전하면서 그는 사진기자가 갑자기 카메라를 꺼내들 만큼 한참을 울었다. 나도 괜히 목이 메어 손수건을 건네주고 가만히 기다렸다. 언젠가 올레길을 걷다가 보탠 내 고마운 마음도 그 중년의 사내에게 가닿았을 것이다. 진심과 선의란 그런 것이겠구나.
-왜 그렇게 운 거 같아요.=너무 고마워서요. 그 오빠가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일했을 거란 생각을 못했던 거죠. 나하곤 다른 뭔가 있겠지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또 그 사람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일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뀌는 계기가 됐던 거 같아요.
-제주올레에서는 ‘고맙다’는 게 거의 상시적인 말인가보네요.=길에서 저희랑 마주친 분들에게 제주올레 사무국에서 일한다고 하면 대뜸 그러세요. 길 걸어서 너무 좋고, 고맙고, 행복하다고요. 그런 걸 저희 사무국 직원들은 ‘올레뽕’이라고 하는데 결국 그 뽕을 저희가 만든 거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맞은 뽕이 또 올레에서 일하는 우리들의 뽕이 돼요. 선순환이죠. 그래서 제가 가끔 스태프들에게 그래요. ‘뽕 맞으러 밖에 나갔다 와라.’
-의미 있고 보람 있겠네요.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턴이 아니라도 누군가 발견했을 테지만 셰익스피어가 아니었다면 그의 문학작품들은 태어날 수 없었을 거란 말처럼 지금의 제주올레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전혀 다른 모습의 제주 올레길이 되었겠군요.=그럴 수도요. 가끔 이사장이나 스태프들과 얘기하면서 ‘우린 참 괜찮아’ 그러면서 서로 자뻑을 날리긴 해요. (웃음) 제가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연 같은 걸 하면 그런 얘길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길을 냈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혀 다른 모양이었을 거다. 일단 몇 개년 계획을 세운 다음 예산부터 먼저 확보하려 했을 것이고 땅부터 샀을 것이다. 땅을 살 수가 없으면 길을 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누군가 한발 더 나아가 협의를 거쳐 통과권을 얻겠다 그러면 얼마나 골치 아플지 아니까 진작에 접었을 거다. 한다면 쉼터 같은 것도 더 많이 만들었을 테고’ 그렇게 말하면 거의 동의해요. (웃음)
-올레 사무국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것 같아요. 채용 공고를 내면 경쟁률이 3천 대 1이나 된다고 들었어요.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죠.=직장으로선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직업으로서의 만족도는 무척 높은 거 같아요. 되게 보람 있는 일이잖아요.
그럴 것이다. 내가 행복한 일이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건 다시없는 삶의 축복임이 분명하다. 그런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천당으로 가는 티켓 모으는 거죠”-제주올레에서 안은주의 역할은 뭔가요.=음. 속어라서 좀 그런데, 시다바리요. 저도 그렇고 제주올레 사무국의 역할도 그렇고요. 제주올레에는 시다바리가 꼭 필요해요. 이 길에는 많은 이해 관계자가 있어서 충돌하고 갈등합니다. 돈은 벌지 말아야 하는데 돈은 필요하죠. 올레길은 땅을 사서 길을 낸 게 아니라 빌린 거잖아요. 사유지가 됐든 공유지가 됐든 공유하는 건데 내 것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죠. 남의 땅에 길을 내고 표식을 낸 거니까 어떻게 보면 위험요소가 많아요. 탄탄하지 않은 거예요. 공유의 정신이 계속돼야 이 길이 오래갈 수 있죠. 그러려면 시다바리의 역할이 꼭 필요할 수밖에요. 길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또 한 가지가 뭐냐 하면, ‘길을 내는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예요. 지금 사무국 직원이 16명인데 이 일을 하는 우리가 안 행복하면 어떻게 행복한 결과물이 나오겠어요. 근데 요즘에는 일에 치여서 길을 내는 사람들이 행복한 건 점점 까먹고 지내는 거 같아 마음이 조급하고 심란합니다.
믿음직한 고민이고 갈등이란 느낌.
-상호 각인 효과처럼 제주올레와 안은주라는 사람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거겠죠.=여기 와서 제가 가장 많이 깨닫게 된 건 자연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거였어요. 자연이 가진 치유의 힘이랄까요. 도시에서 자연은 여행 가는 거였고, 여행도 자연을 보러 가는 여행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했죠. 저는 사람만 위로가 되는 줄 알았어요. 여기 제주의 시계는 약간 느리게 가는 것 같아요. 제가 주간지 기자 생활을 해서 그런지 수요일 마감을 중심으로만 생각해서 날짜를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여기선 날짜가 가는 걸 알고 계절이 오는 걸 아는 거예요. 또 서울에서는 일 때문이나 내가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연락을 했는데 여기서는 좀 달라요. ‘그 사람 요즘 어떻게 살고 있지. 별일 없나’ 그러면서 연락을 하고 특별히 일 얘기도 아닌데 수다를 떠는 거죠.
-올레길을 걸으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는데 그런 거겠군요.=아마도요. 저한테 느리게 산다는 것은 자기를 좀 돌아보는 거예요. 일이 많고 바쁘고 그런 순간이 계속되면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아침에 일어나면 미간이 찌푸려져 있고 그러잖아요. 자기 시간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여기서 아침에 일어나면 1시간 반을 제게 써요. 그건 서울에선 절대 못 가졌던 시간이에요. 제주올레의 영향으로 제주로 이주 와서 사는 젊은 사람들이 요즘 많이 생겼는데 그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 거 같아요.
-하는 일에 비해서 특별히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만족하시나봐요.=저뿐 아니라 우리 사무국 직원들이 다 그럴 텐데요, 무엇보다 심리적인 보상을 많이 받잖아요. 이 일을 정말 즐겁게 하니까요. 억지로 하는 일이었으면 돈이나 겉으로 보이는 다른 보상이 있었어야겠죠. 근데 저는 이 일을 하면서 내가 기분 좋고 위로받고 행복할 때가 많으니까 그거면 됐죠. 나머진 불필요한 욕심이죠.
-안 국장을 비롯해서 올레길 관련자들은 한 방에 천당 예약했지 싶은데요. 다른 사람 행복하게 하는 일을 많이 해서.=한 방에는 아닐 거예요. 왜냐하면 천당은 한 번에 가는 직행은 없고 아주 여러 번 갈아타야 되는 거 같아요. 티켓 한 장씩 모으는 거죠. 계속 갈아타고 갈 수 있게, 살면서 계속 티켓을 늘려가야죠.
진심과 선의 앞에서 긴말은 사족느닷없고 준비 없는 대박 타령으로 사람을 헛되게 하지 않는 그의 적선론(積善論)이 마음에 쏙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제주올레의 가장 중요한 정신일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간세다리(게으름뱅이)처럼 꼬닥꼬닥(느릿느릿) 걸어가는 어떤 이들의 모습. 제주올레가 앞으로 얼마나 잘될지 그건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잘못되지는 않으리라는 기분 좋은 안도감에 인터뷰 다음날 마음껏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올레길 어느 정겨운 문전에서 뒷짐 지고 ‘셔?’ 이런 시 한 구절 따라하며.
“제주에선 소리보다 바람이 빨라/ ‘안에 계셔?’ 그 말조차 다 흘리고 지워져/ 마지막 겨우 당도한/ 고백 같은/ 그 말/ ‘셔?’” -오승철 ‘셔?’
진심과 선의 앞에서 긴말은 사족이다. 다 흘리고 지워져 ‘셔’ 하나만 있어도 아는 이들끼린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녹취 강선일 인턴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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