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인터뷰 기사를 큰 글씨로 프린트해서 봤다며 살림예술가 이효재가, 아마도 익숙지 않았을 손놀림으로, ‘좋은 사람으로 잘 살겠습니다’란 문자를 보내왔다. 충분히 잘 사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속으로 혼자 웃었다. 어떤 이가 부자를 ‘잘 사는 사람’으로, 가난한 사람을 ‘못 사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게 불편하다며 그냥 ‘돈이 많은 사람, 돈이 없는 사람’ 정도로 표기하자고 해서 공감했다. 돈이 있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돈이 없다고 못 사는 건 더 아니다.
훌륭한 옆지기를 둔 세 아이의 아빠내가 보기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은 ‘잘 사는 사람’에 속한다. 그는 어느 글에서 자신의 프로필을 ‘세 아이의 아빠, 훌륭한 옆지기를 둔 쌍차 해고자’라고 적었다. 그늘도 없고 부러움도 없다. 어떻게 더 잘 사나. ‘쌍차 복직’까지 첨가되면 완벽한 스펙이다.
2009년, 쌍용차에서 벌어진 대량 해고 사태로 2646명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77일간의 파업과 경찰특공대와 용역깡패들이 합세한 무자비한 진압작전. 94명이 구속됐고 240억원이 넘는 손배, 가압류, 구상권 청구가 이어졌다. 그 뒤 몇 년 새 쌍용차에서 일했던 노동자와 그 가족 24명이 세상을 떠났다. 목을 맸고, 번개탄을 피웠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고, 잠을 자다가 문득 세상과 이별했다. 그 아득한 슬픔과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해고자들은 목숨을 건 단식도 했고, 특수부대원처럼 부산까지 한달음에 내달리기도 했고, 15만V 송전탑에도 올랐다.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한뎃잠을 자며 19개월간 문상객을 맞았다. 지난 2월, 긴 법정 싸움 끝에 항소심에서 2009년의 정리해고가 무효라는 판결을 받아냈지만 사 쪽의 상고로 인고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고자들의 몸을 죄는 밧줄 같은 경제적 고통은 상시적이다. 지난 5년, 쌍차 해고자 선도투 30여 명은 그런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 고동민은 그중 한 사람이다. 해고자 중 막내뻘에 해당한다는 마흔 사내의 목소리를 목판에 새기듯 들었다.
-요즘은 하루 일과가 어떤가요.=아침 6시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서, 아니 출근하는 회사는 없지만 공장 앞에 서서 출근 인사 하고 같이 아침밥을 나눈 뒤 일정에 따라 1인시위를 하거나 다른 현장에 연대하러 갑니다. 저녁엔 퇴근 인사 하고 7시쯤 공장 앞 거점에 당직자만 남기고 퇴근합니다. 주말엔 서울 집회가 많아서 거기 갑니다. 저희가 그동안 받은 게 많아서요. 대한문에선 시민들에게 해고자 복직 서명을 받고 있어요.
-공교롭게도 오늘(4월8일)이 5년 전 사 쪽이 노조에 해고를 통보한 날이군요. 그날 이후론 지금 말한 것과 비슷한 일상이었겠네요.=그렇죠. 큰 줄기에서는 비슷하지만 메뉴는 다양했죠. 안 해본 게 없어요. 벌써 햇수로 5년째인데 인이 박여서 그런지 버틸 만해요. 지난해 11월 경기도 평택으로 내려왔는데 대한문에 있을 땐 퇴근도 없이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한두 달 집에 못 가는 건 예사였죠.
연이은 죽음, 견딜 수 없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겠네요.=쌍용차에서의 투쟁은 뭘 했다, 뭘 만들었다기보다 계속 그 자리를 지켜온 거 같아요. 비인륜적이고 가슴 아픈 일들을 견뎌내면서 이 싸움을 지켜온 거죠. 매 순간 힘들죠. 제가 지금 아이가 셋인데, 파업할 때 첫째는 두 달 동안 고모네에 가 있었어요. 당시 아내가 가족대책위 대표여서 둘째는 엄마 손 잡고 파업 현장에 있었는데 경찰과 용역들의 어마어마한 폭력에 그대로 노출됐죠. 셋째는 엄마 뱃속에 있었습니다. 파업 끝나고 6개월 동안 감옥에 있다가 나와보니 애들이 많이 불편해 보였어요. 지금은 놀이치료를 통해서 괜찮아지긴 했는데 둘째아이는 여전히 화를 잘 못 참아내요.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거죠. 첫째는 그 나이 또래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숙함이 있어요. 그 또래하곤 전혀 다른 아이가 된 거죠.
아이들이 아빠에 대한 애착이 말도 못하게 많아요. 막내는 제가 집에 오면 밖에 나가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할 정도예요. 출근하려고 하면 거의 대성통곡을 해요. 막내가 그러면 둘째는 뒤에서 말없이 눈물 찍고 있고요. 헤어지는 거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거 같아요. 지난 5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거든요.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이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20대 때부터 자신의 가장 큰 꿈 중 하나가 ‘좋은 아빠’였다는 사내의 고백을 듣는데 그 말에 감전된 것처럼 나도 몸이 움찔했다.
-그럼에도 줄기차게 싸우는 이유는 뭔가요.=싸움을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해요. 사실 너무 힘들거든요. 그런데 동시에 그만할 수 없다는 생각도 늘 해요. 그만둘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많죠. 우리가 해고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옳다부터 시작해서요. 하지만 제가 쌍차 투쟁을 계속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더 이상 사람들이 죽는 걸 견딜 수 없어서예요. 그 죽음들이 다 나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 해고자들에겐 ‘내가 투쟁을 잘못해서 돌아가신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번민이 있습니다. 형들도 그렇고 저도 그래요. 대한문 분향소를 설치하기 전에 희망버스, 희망뚜벅이 등 ‘희망’ 자 붙는 투쟁을 정말 열심히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돌아가시는 거예요. 견딜 수가 없어서 광주로 도망치듯 내려갔습니다. 3박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엄청 울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울었던 거 같아요. 너무 슬펐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사람 사는 게 그럴 수 없는데….
누군가의 동료로 동지로 변하는 과정곰처럼 덩치 큰 사내의 말줄임표가 하도 깊어서 잠시 멈춰 있었다.
-그래서 대한문 분향소를 지키는 일에 그렇게 가열찼던 거군요.=그렇죠.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린 뒤 시민들이 함께 상주가 되어주고 연대가 시작된 뒤에는 더 이상 돌아가시는 분이 없었거든요. 위로도 받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죠. 그치만 육체적으론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울 때도 있었고요. 아침 6시30분쯤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길바닥 위에서 잠이 깰 때가 있어요. 그들이 보기엔 영락없는 노숙자죠. 뭐랄까 ‘너랑 나랑은 다른 사람이야’ 하는 표정 있잖아요.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불편하고 힘들었어요. 근데 그런 게 어떻게 극복됐냐 하면 경찰들이 저흴 너무 괴롭히니까 그런 걸 생각할 만한 정신이 없는 거예요. 집회하면 트집 잡고, 누우면 못 자게 하고. 그때 대한문에선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서 있는 것도 다 투쟁이었어요. 경찰들은 우리를 개밥그릇만도 못하게 취급했어요. 연행하고 협박하고 조롱했지만 물러설 수 없었죠. 우리에겐 그곳이 마지막 생명줄이었으니까요.
바로 그곳에서의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신문 칼럼을 썼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어서 나는 그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살다보면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를 명확하게 나눌 수 있을 만큼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는데 고동민씨에겐 쌍차 해고가 거기에 해당하나요.=그럼요. 세상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어마어마하게 바뀌었죠. 77일 파업이 제 인생에서 정말 다른 나를 만들어준 거예요. 노동자들 투쟁이란 걸 책으론 몇 번 봤지만 이게 구현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정말로 변하는 걸 직접 보게 된 거죠. 예를 들면 소녀시대만 좋아하던 아저씨들이 갑자기 노동가나 투쟁가를 따라 부르고 노동에 관한 공부를 하고 관심 없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해고노동자들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삶이 바뀌는 장면을 목격하니까 저한테도 삶의 전환점이 된 거죠. 해고되기 전에도 동료들과 노동자 연극을 하면서 다른 현장에 연대하러 다니고 그랬지만 그때는 가도 대충 앉아 있었던 거 같아요.
-운전으로 치자면 조수석에만 앉아 있었던 거네요.=그렇죠. 내 운전이 아니고 내 차가 아니었던 거죠. 그랬는데 해고되고 77일 투쟁을 하면서 내 차 같은 느낌이 든 거죠. 저도 그랬지만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누군가의 동료나 동지 이런 사람들로 변해가는 과정이 정말 경이로웠어요.
-싸움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해고자의 역할에 갇히는 느낌은 없었나요.=사실 그런 점이 많이 힘들죠. 가족이랑 외식하거나 환하게 웃고 있거나 행복한 마음이 들면 위축이 돼요. 지금 누가 철탑에 올라가 있는데, 저분들은 거리에 있는데 이런 생각이 계속 드니까요. 중요한 사회를 볼 일이 있어서 큰맘 먹고 와인빛 양복을 샀는데 후회가 되는 거예요. 좋은 일보다 장례식장처럼 안 좋은 일로 가는 데가 훨씬 많은데, ‘내가 이 양복을 입을 일이 없겠구나. 괜히 샀나’ 그러면서 되게 우울했어요. 예전에는 쌍용차 해고자나 가족들 문제가 아니면 누가 돌아가셔도 눈물이 별로 안 났는데 요샌 내 피붙이 같은 생각에 마음이 저려요. 그렇다고 모든 일에 다 그럴 순 없잖아요. 용량의 한계도 있고 내가 살려면. 그러니까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 부끄러울 정도로 또 금방 잊어요. ‘이 슬픔이 언제까지 갈까? 내일이면 가셔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울어요. 그러다보면 내 자신이 너무 싫어지는 거예요.
세상의 슬픔에 감정의 촉수 열려아아, 세상 모든 슬픈 일에 감정의 촉수를 다 열어놓고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고단한 것일까. 보육시설에 온 후원자 한 명이 신발장에 놓인 유명 메이커 운동화 한 켤레를 보고 ‘후원금으로 이런 거나 산다’고 불같이 화를 냈단다. 원장 수녀님이 울면서 말했다지. ‘우리 아이들도 이런 거 좋은 줄 알고, 신고 싶은 마음도 있답니다’ 그런 것이다. 가난하다고 부끄러움을 모르거나 해고자라고 해서 행복한 게 뭔지 모르지 않는다. 상황에 맞춰 잠시 눌러놓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해고자 형들에 비해서 쌍차 재직 기간이 길지 않네요.=네, 짧은 편이죠. 만 6년 다녔습니다. 제가 워낙 가난하게 자라서 사실 제게 쌍용자동차 입사는 로또 맞은 기분이었거든요. 마트 같은 곳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120만원씩 받다가 8시간만 일해도 200만원씩 받으니 꿈같더라고요. 아내가 첫째 가졌을 땐 새우깡이랑 사발면 같은 걸 아까워서 못 사먹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살다가 쌍차 입사 뒤 생긴 둘째 때는 대학병원 같은 데 가서 검진도 받고 그랬으니 좋았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처가에 갈 때도 선물 한 보따리 사가고 그러면서 한 2~3년은 돈 버는 일이 즐거웠어요. 그러다 그런 것들이 좀 시들해졌을 때 공장 안에서 노동자 연극을 시작하면서 다시 활기가 생긴 거죠.
-해고 전과 해고 뒤의 삶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겠네요. 해고 뒤 지인들과의 관계가 다 파괴됐다고 말했던데.
=관계가 거의 없죠. 해고자라는 게 부끄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잖아요. 고향이 부산인데 내려가면 친구들도 그렇고 친척들도 그렇고 다들 안쓰러워하는 거죠. 친구들을 만나도 공통 관심사가 없어요. 있다면 사춘기 소녀를 둔 아빠들의 공통점 정도랄까. 나머지는 뭐 다들 연봉이 어떻네, 집이 어떻네, 자동차가 어떻네 이런 물질적인 얘기만 주로 해요. 제가 생각하기에 세상은 그런 게 아닌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그런 마음들이 보태지고 풍부해지는 거지 돈이 전부는 아닌데 너무 돈이 중요한 것처럼 얘기들을 하니까 되게 불편해요.
-돈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요.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그런 건 아니에요. 부럽긴 하지만 돈이 없다고 위축되진 않아요. 어떤 이들은 쌍용차에 복직하려는 게 옛날의 잘나가는 정규직 노동자로 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냐는 얘기도 하거든요. 저는 아니에요. 아주 중요한 순간에 제가 복직을 못하는 걸로 결정될 수도 있잖아요. 큰 합의를 위해서 그래야 한다면 저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해고 생활 5년 동안 꼭 정규직 노동자로 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던 거 같아요. 사는 데 진짜로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 같진 않아요. 금전적인 건 없더라도 관계가 있고 사람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복직할 거라 확신하죠.=그럼요. 확신하죠. 그렇지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저는 저보다도 징계해고를 당한 조합원(정리해고 대상자가 아니었는데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다 해고된 사람들) 형들이 꼭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그 형들이 ‘괜히 싸웠어’ 그런 생각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괜히 싸웠어, 이런 얘긴 너무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잖아요.
내 팔이 열 배쯤 늘어난 느낌그의 단단하고 다정한 결의에 무한 응원을. 그런 결의가 학습을 통해 습득될 수 있는 거라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아깝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복직이 되면 개인적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제일 첫 번째 꿈은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다시 연극을 하는 거예요. 노동자가 노동자로만 규정되지 않는, 똑같은 사람이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출연도 하고 연출도 하면서 전국 사업장 투어도 하고요.
그의 목소리가 풍선을 열 개쯤 매단 듯 활기차고 유쾌해졌다. 얼마나 소망하는 일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그는 이어서 사진으로, 글로, 음식으로, 영화로, 그림으로, 눈물로 자신들에게 마음을 포개주었던 연대자들이 쌍차 문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팔을 뻗어주었다며 덕분에 자기 팔이 열 배쯤은 늘어나는 느낌으로 만들어주었다고 고마워했다. 세상은 그렇게 넓어지고 환해지는 것이리라.
잘 사는 노동자 연극배우, 고동민에게 꽃다발 건네듯 미리 축복을 보낸다.
“누군들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이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박시교 ‘꽃 또는 절벽’
원치 않게 삶의 벼랑으로 몰린 모든 이들의 꿈도 원래는 다 꽃이었을 것이다. 그걸 안 잊으면 잘 살 수 있다. 고동민도 그리고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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