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기억저장소를 만들 계획이라는 기록전문가 김익한은 자신의 인터뷰를 읽으며 이 일이 ‘사랑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게 하는 것이란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고 했다. ‘사랑의 기억’만이 왜곡된 구조를 바꿔가는 진득한 힘인 동시에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이라고 덧붙였다. ‘기록’이라는 객관적 명제 앞에 얼핏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사랑의 기억’이란 단어를 왜 썼는지 나는 금세 이해했다. 모를 리 없다.
나는 전장의 병사와 연락하고 있었구나김익한 교수가 연결해준 자원봉사자 이승용은 그런 ‘사랑의 기억’에 속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약사인 이승용은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전남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왜 그곳에 계속 머물고 있는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된 세월호 현장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군데군데 훼손된 통신선으로 연락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답신 문자는 짧고 느렸다. 12시간 만에 답이 오기도 하고 그나마 마지못한 듯 명료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꺼리나, 무례한 사람인가, 그런 우려와 의구심을 안고 진도로 내려갔다. 팽목항에 있다가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인 진도체육관으로 가는데 스리쿠션으로 겨우 연락이 닿은 그가 팽목항에 있으니 다시 그리로 오라고 했다. 미리 약속한 시간과 장소가 있었나, 하는 투였다. 중간 지점에 차를 세워놓고 잠시 망설였다. 인터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여곡절 끝에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불친절한 연락에 대해 먼저 물었다. 그는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무슨 말끝에 그는 세월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감각, 날짜감각 이런 걸 잊게 된다고 했다. 이곳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다보면 전화를 잘 못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를 놓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다급하고 압도적인 현장에 있다보면 그 외의 모든 상황에 무뎌질 가능성이 높다. 트라우마에 노출된 사람의 시간감각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와이키키 해변에 누워 시베리아 눈보라 속에 있는 이와 통화하면 얘기 자체에 온도차가 있을 것이다. 후방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병사와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깜빡하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늦은 밤, 불빛도 없는 팽목항 방파제의 한구석에 앉아 그의 얘기를 들었다. 너무 어두워서 말하는 표정을 자세히 볼 수도 없었다. 혹시 실종자 가족들에게 누가 될까봐 그가 택한 장소였다. 노트북도 메모지도 볼펜도 없이 나는 종군기자가 된 심정으로 세월호 트라우마가 덮친 참혹한 전장의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자원봉사자 이승용의 말을 꾹꾹 눌러담듯 들었다.
-4월18일이면 세월호가 침몰하고 이틀 뒤예요. 그때 여기(팽목항) 왔다는 거죠.=네, 금요일에 왔어요. 대한약사회에서 부스를 차려놨는데 약도 없고 약사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한 약이 뭐 있을까 생각하다가, 제가 가까운 동네에서 아내와 약국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몇 가지 약들을 챙겼죠. 청심환이 안정제잖아요. 그걸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엄청 싸들고 갔죠. 실제 청심환을 많이 찾으셨고요. 피로회복제와 쌍화탕도 좀 있었는데 금방 동이 났죠. 처음엔 드릴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어요. 근데 다가가는 것도 조심스럽더라고요. 여기 팽목항과 체육관은 1분 1초 상황이 바뀌면서 어떤 일이 터지면 기자들이 확 따라가기도 하고 그때마다 울부짖음이 들리고 쫓아가서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구경하는 것 같기도 해서 주춤거리고. 며칠 있다보니 약도 약이지만 내가 같이 있어줘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정부하고 똑같잖아요”-약사 자원봉사자로서 주로 어떤 일을 하셨어요.=24시간 운영되는 약국 부스가 여기 2곳, 체육관에 2곳 해서 모두 4곳이 있었죠. 지금은 2곳이에요. 초기에 제가 주로 한 일은 약 구하러 다니는 것이었어요. 가족들이 A라는 약을 찾는데 그게 공급이 잘 안 되니까 교대하는 약사님이 오시면 저는 약을 구하러 갔죠. 약사들이 한번 오면 12시간씩 근무하고 가는데, 약국 4곳을 24시간 운영하려면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해요. 약 공급이 어느 정도 된 뒤에는 약사를 수급하는 일이 과제였어요. 제가 여기서 집이 가까우니까 그런 일들을 맡게 됐어요. 여기 현장의 약국은 일반 약국과는 달라요. 어느 날 새벽 1시에 한 어머님이 안대와 귀마개를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체육관엔 24시간 불을 켜놓고 있으니까 필요하셨던 거죠. 근데 저희에겐 그게 없죠. 그래서 제가 체육관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6∼7곳인가 돌았는데 없는 거예요. 어떡해요. 2시간 걸려 해남까지 가서 사다 드렸어요.
-그게 약사가 할 일은 아니잖아요.=그럼 정부와 똑같잖아요. 우리 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정부에 분노한 게 그거잖아요. 얘기하면 다 들어준다고 약속했어요. 근데 확인해보면 하나도 안 돼 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약도 똑같아요.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데, 한 번 갔다오면 되는데 그걸 안 해주면 어떡해요. 그런 일 없게 하려고 우리가 자원봉사 하러 왔는데, 정부가 못하는 일을 해주려고 왔는데 똑같은 짓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힐난과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꽂히듯 날아왔다. 내친김에 더 물었다.
=저는 자원봉사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요. 이번에 여기 와서 확실하게 알았어요. 정부가 하는 일이 있고 자원봉사자가 하는 일이 있는데, 자원봉사자들은 정부가 못하는 부분을 해야 되는 거 같아요.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실적내기예요. 우리 일 많이 했다, 이런 거요. 안 된 것,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 기록 안 해요. 한 것만 기록하고, 했다고 기록하고, 할 것 같다고 기록해요. 자원봉사자는 잘 되는 건 놔두고 안 되는 걸 빨리 찾아서 하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디에 소속돼 있지 않으니까 과감하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죠. 초기에 바지선에서 일하는 민간 잠수부들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어요. 잠자리도 그렇고 식사도 그렇고요. 열 몇 명이 계속 거기서만 있고 사육당하듯 풀뿌리만 먹고 있는 거예요. 피해자 가족들이 거기 가서 김치찌개를 끓여주기까지 했어요. 문제제기를 해도 시정되지 않아서 계속 시끄럽게 했죠. 그랬더니 그다음부터 밥이 좋게 들어갔어요. 잘못된 정보를 제대로 알리는 것도 자원봉사자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이 아닌 얘기들이 있잖아요. 잘못된 기사들, 그런 걸 세세하게 기억했다가 기록하는 분들에게 얘기해서 바르게 기록되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원봉사학 개론에 나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가 규정하는 자원봉사의 개념이 명확하고도 인간 지향적이라서 기꺼이 수용했다.
“애기들 이름 부를 때 예감했죠”-여기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다 같은 마음이지는 않을 거잖아요.=그렇죠. 약사 자원봉사일 경우 한번 오면 12시간씩 근무하는데, 저는 그분들이 약국에만 있게 하지 않고 밖으로 빼줘요. 이게 말이 좀 이상한데 충분히 느끼게끔 해줘요. 청소부터 시작해서 다른 일들을 많이 시키죠. 충분히 느끼고 가라, 약만 주려고 오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소통하신 분들은 다음에 휴가를 내서 몇 번 더 오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체 상황을 잘 몰라서 마음이 실리지 않죠. 예를 들어 비가 많이 올 때는 구조 작업이 하나도 안 되잖아요. 그러면 약을 찾는 수요도 없어요. 밤엔 더 그렇죠. 그러니까 밤근무를 하셨던 약사들은 찾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데 이걸 왜 하는지 의아해해요. 나중에 비난하기도 해요. 그런데 정조 시간이 새벽에도 있잖아요. ‘애기’들은 정조 시간 전후로 올라와요. 그때 정말 약이 필요한데 낮에만 약국을 하면 이걸 안 한 거나 똑같죠. 그런 설명을 잘 해야죠.
그는 내내 ‘애기’들이란 표현을 썼다. 학생들을 의미하는 거였다. 여기서는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찌르르했다.
-진도체육관이나 팽목항에 있는 게 육체적·심리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어요.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고요. 어떻게 계속 여기에 있나요.=여기서 어머니들은 가슴에 애기들 사진을 달고 다녀요. 4월18일, 제가 첫 번째 왔던 날이에요. 어머니들이 팽목항 방파제에 서서 애기들 이름을 부르며 우시는 거예요. “○○야, 엄마가 미안해. 어서 돌아와.” 그때 내가 예전으로 못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예감했죠. 그다음에 신원확인소에 들어가서 입회할 때 가족들에게 약속했어요. 마지막 한 명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있겠다고요. 그러니 끝까지 있어야죠.
대한민국 역사만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역사도 그럴 것이다. 이미 내 주위엔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 좀더 여유 있게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서울에서 이주해온, 아이가 넷인 부부 약사 이승용은 그 변화의 진폭이 더 클 것이다. 세월호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었으므로.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일에 어떤 의미를 느끼니까 견디시는 거겠죠.=가족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새벽에 물건을 나눠주는 자원봉사 부스도 몇 군데 있지만 새벽에 딱 버티고 앉아서 불 켜고 있는 곳은 이제 약국밖에 없어요. 실제 새벽에 약을 찾으러 뛰어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마 친구분이었던 거 같은데 “제 친구가 딸을 찾았어요. 약 좀 주세요” 그러면서 오시죠. 정이 든 약사가 교대하지 말고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가족분도 계시고요. 위로가 되는 거죠.
“안산에 가면 꼭 챙겨주세요”-많은 도움이 되겠네요.=그렇다고 생각해요. 도움이 되려고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길게 말을 멈추었다가 내뱉듯), 실질적으로 모든 자원봉사자나 공무원은 제로죠. 빵점 맞은 거죠. 한 명도 못 구했잖아요. 빵점인 일을 하는 거예요, 지금. 저희가 아무리 24시간 여기 있고 약을 줘도 빵점이에요.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해야 한다, 그런 거죠.
아무리 잘해도 빵점인 일을 묵묵히, 끝까지 해야 하는 심정이 어떨지 잠시 생각하다가 손발이 저려왔다. 세월호 트라우마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겠구나, 짐작했다.
-가장 힘든 게 무엇인가요.=안 나오는 거요. 물속에서 안 나오는 게 제일 답답하고 안타깝죠. 지금처럼 태풍 온다고 바지선을 뺀다는 얘기를 들으면 막 미치겠어요. 이러다 선거가 끝나고 월드컵이 시작되면 다 잊혀질 거고. 인양하자는 얘기가 나오면 어떡해요. 현장에서 대한민국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확실하게 느낄 때도 괴롭죠. 온갖 공무원들이 다 와서 일하고 있잖아요. 근데 물 하나 달라고 하는데도 나는 여기까지만 갖다줄 테니 그다음은 네가 옮겨, 공무원끼리 하는 그런 싸움을 실제 목격했어요. 기막히죠. 개인적으로 빨리 세월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김혜자나 한비야처럼 아프리카에서 굶어죽기 직전의 아이들에게 콩죽을 먹이는 구호활동을 한 사람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본 것을 잊을 수도 없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통도 슬픔도 껴안고 가야 한다.
세월호 사건이 아직 안 끝났다고 강조하던 그가 동석했던 치유자 정혜신에게 한 아이의 어머니를 거론하며 경기도 안산에 가면 챙겨 봐달라고 몇 반 엄마인지를 자기 휴대전화에서 찾아 알려주었다.
-지금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는 일인가봐요.=네. 자기 아이가 있을 거라고 모든 텐트와 차문을 다 열어보셨던 분인데 아이를 찾은 뒤 굉장히 안 좋은 상태로 올라가셨어요. 꼭 좀 돌봐주세요. 안산에서 잘해주셔야 될 것 같아요. 우선 여기서는 무사하게 잘 올려 보내는 역할이 있는 거 같아요. 잘해주세요.
그녀와 내가 안산에서 치유적 네트워크와 치유적 공간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꼭 그러마 약속했다. 그 순간 우리는 세월호와 관련해 진도와 안산을 대표하는 사람들처럼 비장했지만 오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도 진심이었고 우리도 진심이었다.
팽나무 알은 대나무로 만든 장난감총의 총알로 쓰이는데 총알이 날아갈 때 ‘팽’ 하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팽나무란다. 팽목항의 팽목이 바로 그 팽나무다. 슬픔과 고통이 총알처럼 팽팽 날아다니는 현장. ‘지금 한국에서 가장 슬픈 이름이 된 팽목항’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서 어둠에 잠겨 있는 팽목의 바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런 곳에서 시간감각, 날짜감각이 그대로면 그게 외려 정상적이지 않으리.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보호하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인터뷰를 끝낸 뒤 그를 깊게 포옹하고 등을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날짜를 잊고 세월호를 잊지 않고“어린 물살들이 먼바다에 나가/ 해종일 숭어 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불빛들은 모두 앞다퉈 몰려나와/ 물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유재영, ‘와온의 저녁’
맘껏 놀고 돌아온 어린 물살들에게 앞다퉈 길 밝혀주는 곳, 그런 마을의 어른이고 싶었다. 더 많은 ‘이승용들’이 있어서 그런 어른사회가 꼭 올 수 있으면 좋겠다. 목메어 그렇게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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