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아니라 풍랑주의보라고 표현했어야 하는데 그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자신의 인터뷰를 읽은 자원봉사자 이승용의 첫 반응이 그랬다. 전남 진도 현장에서 가족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수색 중단이라서 태풍은 일종의 금칙어인데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자책했다. 인터뷰어로서 내가 좀더 세심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와 함께 ‘저이는 끝까지 함께하겠구나’ 안도했다. 그의 반응이 누구를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동네 사람의 어려운 일에 함께하는 이웃의 자세로 느껴져서다.
한동안 ‘이웃’이란 화두에 몰두했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소중한 선물을 다시 꺼내든 느낌이었다. 왜 잊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이웃이란 건 무엇일까. 그러다가 경기도 안산에서 25년을 거주했다는 어느 이웃을 만났다. 세월호 참사로 딸아이를 잃은 부모와 15년째 이웃인 주부 김삼엽씨. 아래·위층 이웃에서 3살 때부터 내 아이처럼 봐온 아이가 수학여행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말은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러니 부모는 오죽할까.’ 그 문장이 후렴구처럼 대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고, 우리의 대화는 목멤과 눈물로 자주 끊겼다.
구석에 박혀 있던 소중한 선물세월호 참사를 통해 민낯의 의미를 절감했다. 자본의 민낯, 권력의 민낯, 욕망의 민낯들. 그렇게까지 야비하고 무능하고 추악할 줄은 미처 몰랐다. 깊은 바닷속 같아서 아직도 민낯의 끝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한복판에서 평범한 이웃들의 선한 민낯도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 무책임, 망언, 이기심으로 칼질을 계속하는 인간 군상의 한편에서 어떤 이들은 끝없이 눈물과 기도를 보탠다. 뙤약볕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고, 무슨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조바심 내고, 기막혀서 한밤에 홀로 오열하기도 한다. 세월호를 잊지 말자고 격려하는 한편으로 나부터 그들을 잊고 있었다며 자책하기도 한다. 주부 김삼엽은 지극히 평범한 그런 이웃 중 하나다. 그냥 우리다. 안산의 슬픔과 고통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인 그의 입을 통해 조금 먼 이웃인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단서를 얻고 싶었다.
혹시 부모에게 누가 될까봐 먼 곳으로 소풍 떠난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써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김삼엽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아이가 너무 정스럽고 이뻐서 함께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니 부모는 오죽할까. 양해를 구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그 이름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 아이의 이름은 다영이다. 김.다.영.
-안산으로 언제 오신 거예요.
=1988년 10월요. 아무 연고도 없었는데 남편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여기로 왔죠. 원곡동에 본 건물에다 베니어판으로 덧대어놓은 방이 있었는데 방만 있고 부엌도 마당에 있는 집이었어요. 50에 3만원짜리.
-25년 전인데, 그때 안산의 첫인상이랄까요.
=버려진 곳에 내가 뚝 떨어진 느낌이 들었어요. 그땐 사람도 많지 않았고 황무지처럼 쑥 같은 거 막 자라 있고 나무 같은 건 거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도 없고 임신한 상태라 약간 우울증 같은 게 있어서 그랬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어떠세요. 안산에 오래 살아보니.
=편하고 좋아요. 일단 공간이 넓잖아요.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이건 다 내 거다’ 그런 마음이 들어요. 저는 여기 이 미술관 앞 저수지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여기 살면서 나무 심고 그런 과정들을 다 봤거든요. 지금 대학 4학년인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여기서 그 애 낳고 함께 산책하고 그랬어요.
-오래 살아서 그런 애정이 생긴 건가요. 객관적으로도 그럴 만한 곳인가요.
=진짜 좋아요. 일단 녹지가 많잖아요. 안산은 살아보면 되게 편안한 곳이에요. 저 때문에 이리로 이사 와서 사는 고향 친구도 많아요. 제 바로 밑의 여동생은 잠실에 살았는데 제가 거기 갈 때마다 눈이 많이 충혈되고 따가워서 뭐라 했거든요. 근데 어느 날 동생이 안산으로 이사 오겠다 하더라고요. 지금은 우리 집과 하천 하나 건너에 있는 동네에서 살아요.
지난 겨울, 피어나던 다영이안산에 자주 머물면서 나도 주민이 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곳이라고 말을 보탰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었음이 느껴졌는지 그의 말에 흥이 붙었다.
제가 안산에서 몇 번 이사를 다녔어요. 다 좋았지만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은 5년쯤 살았던 고잔동이에요. 월세 살다가 전셋집으로 옮기기도 했고 딸아이를 거기서 낳았거든요. 단원고 들어가는 산 바로 아래 주택가였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솔향 같은 것도 나고 동네 냄새가 참 좋았어요. 근데 거기 단원고가….
그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가라앉고 멈칫거렸다.
-고잔동이 피해 학생이 제일 많은 곳이죠. 사망·실종 학생만 80명이 넘는다고 들었어요.
=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아이를 잃은 집이 열 집이 넘어요. 그쪽으로 발길을 잘 못 돌리겠어요. 사고 뒤 촛불집회 때문에 두 번 학교에 갔었거든요. 근데 뭐랄까, 뭔가에 짓눌린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갔다 와서 심하게 몸살을 앓았어요.
-사고났을 때 굉장히 놀라셨죠.
=그랬죠. 한 4~5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탈수가 됐어요. 전 늘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는데, 그 배가 사고가 났다는 거예요. 다른 거 아무것도 생각 안 나고 ‘아, 다영이!’ 무의식 속에서 그냥 ‘다영이!’ 그 말 하고 바보가 됐던 거 같아요. 그 집 큰애하고 우리 애가 초등학생일 때 다영이는 애기였어요. 애들 데리고 어디 견학 가거나 이러면 그 애를 내가 업다가 제 엄마가 업다가 옆의 다른 친구들이 업다가 그랬죠. 다영이는 붙임성이 좋아서 다 이모고 엄마였어요. 셋째예요, 다영이가. 너무 이쁜 짓을 많이 했어요.
-다영이를 언제 처음 보신 거예요.
=3살 때요. 우리 딸아이 초등학교 입학식 때였는데 다영 엄마가 등에 띠를 해서 업고 왔더라고요. 둘째는 걸리고 다영이는 업고 1학년짜리 큰아들을 데리고 입학식에 온 거예요. 근데 큰애, 둘째는 너무 이쁜데, 등에 업힌 애가 완전 짱구에다 입밖에 없어요. 눈도 조그맣고요. 그래서 제가 ‘딸아이인데 머리카락도 별로 없고 왜 이렇게 안 이쁘냐’ 놀리고 그랬는데, 세상에, 다영이가 자라면서 누가 봐도 탐날 정도로 이뻐지는 거예요. 키도 쑥쑥 크고 완전히 다른 아이처럼요. 피부도 까맣던 게 뽀얘지고. 왜 어르신들이 그러잖아요. 달덩이처럼 핀다고. 그렇게 피기 시작한 게 지난 겨울, 12월부터는 유난히 더 이뻐지더라고요. 제가 아침에 청소하고 쓰레기·재활용품을 버리러 나가는 시간이 다영이 학교 가는 시간이에요. 그때마다 감탄하면서 ‘다영아, 너 이렇게 이뻐져서 어떡할래? 왜 이렇게 이뻐져?’ 그러면 이렇게 환하게 웃어요. 내가 너무 좋아서 ‘고맙다. 네가 이렇게 웃어주는 게 아줌마한텐 선물이다’ 그러면서 안아주고. 그렇게 날마다 선물 같던 아이인데 사고가 나니까 몸이 바들바들 떨리더라고요. 다영이는 딱 일주일 되는 날 나왔어요. 다영이네 식구가 진도에 가 있는 일주일 동안 저는 먹는 것마다 다 토해내고 기어다녔어요. 잠도 못 자고 뉴스를 켰다가 껐다가 화내다가. 그러니 부모는 오죽했겠어요. 장례 치를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주로 다영이 엄마하고 함께 지내요.
“심리상담, 고문받는 느낌”-뭘 해주고 계세요.
=그냥 함께 지내요. 다영 엄마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일 힘들어해요. 전 3층에 살고 다영이네는 2층에 사는데 아침이면 ‘언니, 나 일어났어’ 이러고 전화가 와요. 그러면 ‘그래, 나 지금 내려간다’ 그래요. 다영 엄마가 푸성귀를 좋아해서 옥상에다 고추·상추·쌈채소를 심어서 그런 걸로 밥 먹어요. 근데 고기나 생선처럼 다영이가 좋아했던 음식들 그런 거 올라오면 목이 메서 못 먹어요. (한참 멈춤)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겠네요.
=다영 엄마는, 죽지 못해서 사는 거죠. 집 바깥에 잘 안 나와요. 머리론 이제 벗어나야 되나 그런 생각 한대요. 옛날로 돌아가진 못해도 사람처럼 살아야 되지 않나 생각하는데 안 되는 거죠. 밖에 나가면 ‘애 죽인 년이 뭐 잘났다고 뻔뻔스럽게 돌아다니냐’ 그런 말이 들려온대요. 아이 데리고 지나가는 엄마가 있잖아요. 그러면 ‘나 보라고 시위하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고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번개 맞은 듯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
-그럴 때 어떻게 하세요.
=가만히 들어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둘이 옥상에 앉아 방울토마토 따먹으면서 얘기하거나 다영이 방에서 사진 보며 그때 놀러가서 다영이가 어땠는지 얼마나 이쁜 짓을 했는지 그런 얘기 해요. 근데 집으로 정부에서 나온 심리치료단이 두어 번 찾아와서 심리상담 같은 거 했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고 고문받는 느낌이래요. 그래서 그다음부턴 제가 못 오게 했어요. 그리고 구청에서 조달해주는 물품들은 제가 대신 받아서 전달해줘요. 그 사람들 마주치는 거 싫대요. 다른 피해 가족들에게도 저처럼 그런 걸 대신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괴로워들 하거든요.
-도움을 주는 게 쉽지 않죠.
=네. 상황도 특수하지만 다영 엄마가 남한테 베푸는 걸 습관처럼 하던 사람이라 더 신경이 쓰이죠. 다영이 장례 치르고 나서 제가 얘기했어요. ‘솔직히 난 자기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게 요구해.’ 그러니까 ‘언니 고마워’ 하더라고요.
-심리치료단보다 더 요긴한 이웃 치유자세요.
=제가 오래전에 큰아이를 잃은 적이 있어요. 태어나자마자 큰 수술을 했는데 가망 없다고 다 포기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엄마가 어떻게 그래요. 결국 태어난 지 50일 만에 이별했는데 저만 기억했어요. 출생신고도 제가 하고 사망신고도 제가 하고 장례도 제가 치렀어요. 옆에 아무도 없었어요.
아이들에 대한 좋은 기억 공감해주길-지금도 안 잊혀지시죠.
=안 잊혀지죠.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다시 막 올라와요.
-그 아이는 아무도 애도해주지 않았네요. 엄마밖에는. 기억도 안 해주고.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다 미워요.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도요.
=안 잊혀지죠. 그 얘길 형제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못했는데 다영이 엄마하곤 많이 했어요. 사고 나기 훨씬 전부터요.
한참 멈춰 있어서 속으로 혼자 웅얼거렸다. 그럼요. 어떻게 잊혀지나요. 죽는 날까지 안 잊혀지죠. 그러니 18년을 함께한 아이들을 어떻게 잊나요. 이제 그만 잊고 훌훌 털자고 하지 마세요. 그럼 세상도 사람도 다 미워져요.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많이 다르시죠.
=그럼요. 일단 다영이가 없잖아요. 세월호 사고 뒤 남편과 많이 다퉈요. 같이 차 타고 가다가 정지선을 안 지키면 그런 것 때문에요. 이런 거 지키지 않아서 세월호 같은 문제들이 생긴 거다 그러면서. 쓰레기 버리는 거 이런 문제에서도. 생활에서 더 철두철미해진다고 하나요.
-다영이는 바로 이웃에 살던 아이였잖아요. 3살 때부터 봤으니까 내 아이 같고. 그런데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느낌이 좀 다를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차이가 많겠죠. 그래도 사람들이 벌써 잊어버리는 듯해서 그게 좀 서운해요. 아직 상황이 진행 중인데 끝난 것처럼 얘기하잖아요. 그게 많이 속상하고 화가 나요.
-좀 막연한 질문 하나 할까요. 이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견뎌내야죠. 견뎌내는 과정이 조금 덜 힘들게 주변에서 도와주는 거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면 조금 덜 힘들게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같이 공감해주는 거요. 그게 가장 필요한 일인 거 같아요. 같이 공감해주고 오래 기억해주는 일이요. 저도 다영 엄마와 다영이 얘기 많이 해요. 할수록 저도 많이 편안해지는 게 느껴져요.
아이들을 통증으로서가 아니라 편안하게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치유 공간을 준비 중이다. 핵심은, 아마도 그 치유 공간의 이름이 될 ‘이웃’이다. 물고기는 자기가 헤엄치고 있는 물의 성분을 분석하지 않고도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산다. 이웃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넘어져서 부상당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한 듯 손 내밀어 일으켜주고 다독여주는 존재다. 그런 설명을 장황하게 했더니 김삼엽씨는 자신은 안산에 사는 동안 늘 그런 이웃이 있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껴안아주고, 토닥이고, 고마워하고고잔동에 살 때는 아이들이 어리니까 마당에 멍석 펴놓고 계란 찌고 감자 쪄서 같이 나눠먹었어요. 지금도 제가 사는 주위에서는 평상시에 먹지 않던 게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나눠먹고 누가 슬픈 일이 있으면 껴안아주고 토닥여줘요. 저는 그런 데 살아요. 사고 전부터 다영이네 같은 이웃과 함께 사는 게 참 고맙다, 감사하다, 그렇게 얘기하곤 했어요. 저도 그랬고 다영이네도 그랬어요.
그런 이웃이 있다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 거대한 슬픔과 고통도 좀 덜 아프게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기꺼이 ‘김삼엽들’의 이웃으로 합류하고 싶은 마음.
“살아 있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만나는 일/… / 신이 가장 잘 알아듣는 언어가 침묵이듯//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일”-김수우
저벅저벅. 그 발자국 소리, 끌로 새기듯 마음에 담았다. 어쩜 내가 누군가의 이웃임을 알리는 소리일지도.
심리기획자 이명수, 녹취 강선일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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