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다. 듣기 좋은 빈말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내재된 치유적 인자의 20% 정도만 제대로 느낄 수 있으면 삶은, 세상은 지금과 전혀 달라진다.
식물조차 선한 말을 들으면 성장이 빠르고 나쁜 말을 들으면 말라 죽는다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어린 아들에게 그 효과를 극적으로 알려주고 싶었던 아빠가 아이와 그 실험을 실행에 옮겼다. 아이에게 한쪽 양파엔 ‘예쁘다, 사랑스럽다’ 유의 긍정 단어를, 다른 양파엔 ‘미워, 보기 싫어, 바보야’ 따위의 험한 말들을 계속하게 했다. 보름 정도 지나면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두 양파가 똑같이 잘 자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빠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실토한 사연은 짠하다. 밤이면 아빠 몰래 험한 말을 한 양파에게 가서 말해줬다는 것이다. 아빠가 시켜서 할 수 없이 나쁜 말을 했지만 ‘너도 옆에 있는 양파하고 똑같이 예뻐, 사랑해’라고. 인간은 본래 그런 선성(善性)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가 된다.
어떻게 할지 몰라, 걸레를 들다
마지막 인터뷰 대상으로 세월호 국면에서 선한 민낯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이를 만났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치유공간 이웃’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지희씨다. 세월호 트라우마 치유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려 한다는 ‘이웃’에서는 그곳에서 함께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이웃치유자’라고 부른다. 몇몇 전문가들의 힘만으로는 이 거대한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상담을 하고 마사지를 하고 텃밭을 가꾸는 이웃치유자들의 힘을 한데 모아야 끝까지 갈 수 있다고 믿어서다. 김지희는 그런 이웃치유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김지희는, 고유명사인 동시에 세월호의 슬픔과 고통에 몸과 마음을 포갠 이들을 상징하는 보통명사다. 김지희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수년 전, 항암치료도 불가능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고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현재까지 자기 몸을 스스로 다스리고 있는 암환자라는 사실 정도다.
그를 처음 본 건 ‘이웃’이 개소할 즈음이었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청소며 집기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1층 계단부터 ‘이웃’이 위치한 3층 현관까지를 엎드려 정성껏 닦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조차 안방처럼 걸레질하는 그에게 ‘청소를 쎄게 한다’고 농을 건네자 ‘제가 입주청소 전문이에요’ 하는 경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뒤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이웃’에서 보는 김지희의 모습은 늘 비슷했다. 어떤 마음인 것일까. 어떤 날 자원봉사 중인 그를 불러 앉혀 물었고 그는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 답했다.
-거의 죽기 살기로 청소를 하더군요, 그것도 기꺼이.=네, 좋아요. 청소하면 되게 기분 좋아요. 새로 오시는 봉사자분들은 어디를 어떻게 청소하는지 잘 모르시기도 하고 주방엔 실장님이 계시니까 주방 보조를 하는 게 편할 거 같고. 저는 안 보이는 데서 하고 다니는 게 좋아서 여기 오면 주로 청소해요. 제가 월요일엔 여기 오고 수요일엔 하용이 전시회를 하고 있는 서촌갤러리에 가는데 거기 가서도 청소를 막…. (웃음)
-청소를 업으로 하고 계신 건 아니죠.=아니에요. 경기도 시흥시 시화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사는 주부예요. 제가 주로 청소를 하는 건, 여기 부모님들이 오시잖아요, 근데 제가 그분들을 뵈면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어요. 인사를 해야 하는지, 웃어드려야 하는지, 모른 척해야 하는지. 어떤 게 편하실지 몰라서. 그래서 일부러 다른 데 안 쳐다보려고 그래요. 주방에서 밥상을 준비하고 있으면 자꾸 시선이 마주치잖아요. 그래서 청소를 하고 다니는지도 몰라요. 저에게 문제가 있나봐요.
아니라고 가만히 도리질해주었다.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는 이를 만나면 보이게 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지금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이웃’에 와서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게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자기 할 일만 하다가 조용히 가니까 그분들이 잘 알지도 못할 거 같은데.=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분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같은 공간에서 마음을 함께하고 있다는 거, 그 기(氣)는 전해질 거라 생각해요. 그분들이 ‘누구 엄마예요? 지희씨?’ 그렇게 제 이름을 알거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도 제가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하는 걸 보시면 제가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아실 거예요. 그래서 그 기가 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아이 셋 중 하나는 걸릴 것 같은 불안감”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치유적 공기를 만드는 게 ‘이웃’의 1차 목표예요. 학원에 다닌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치유의 원리를 딱 꿰차고 있으시네요. (웃음)=제 생각이 그래요. 그 기가 전해지게끔 제가 여기 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어떤 분들처럼 굉장한 기획안을 내서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럴 힘은 없잖아요. 근데 저 같은 사람이 많이 모임으로써 힘이 될 거 같아요. 지금 월요일에 저와 짝꿍으로 일하시는 분은 서울에 사는데 충남 천안에서 일 보고 여기 왔다가 다시 서울로 가시잖아요. 난 저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분은 또 저를 보고 대단하다 그러시지만요.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심리적 착시는 선한 영역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사고 뒤 한 달 동안은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어요. 그 전에는 뉴스도 잘 안 봤거든요. 그러다가 이런 대안언론 있잖아요. 그거 내려받아서 종일 뉴스를 보며 울다가 쓰러져 자다가 했던 거 같아요. 정말 무지했고 그래서 더 무서웠던 거 같아요. 내가 그렇게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집이 서울이 아니어서 광화문이나 청운동 같은 촛불집회에 금방 갈 수도 없고 애들이 어려서 종일 나가 있거나 밤늦게 나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무기력함을 많이 느꼈어요. 난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그런 생각에 괴롭더라고요. 그러다가 안산에 ‘치유공간 이웃’이 생긴다는 글을 봤는데 정말 기쁜 거예요. 여기라면 하루 몇 시간이라도 가서 바닥 닦고 청소라도 해드리고 올 수 있겠다. 누굴 돕는다는 것보다는 아픈 마음으로 같이 해주고 싶었는데 그걸 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왔죠.
-많은 엄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 충격이 컸나봅니다=네, 그랬어요. 우리 아이들 셋을 데리고 임시분향소에 갔는데 애들 영정 사진을 보면서 ‘얘네들을 어떡하지?’ 그러면서 막 울었어요. 그러다가 나오면서 차에 애들을 태우는데 똑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얘네들을 어떡하지?’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이거를 또 이렇게 그냥 지나가면 나는 애가 셋이나 되는데 누구 하나는 걸릴 것 같은 불안감, 그런 공포 때문에 되게 무서웠어요. 사고 터지고 한 달 동안은 저희 애들도 미웠어요. 웃는 게 너무 철없어 보이는 거예요. 언니·오빠들이 이렇게 많이 죽고 사람들이 울고 있는데 너희는 그렇게 철없이 먹을 걸 달라 그러고. 제가 그 정도로 아주 이상했어요.
그 또한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사라진 뒤 이 땅에 살고 있는 엄마들이 보인 많은 반응 중 하나라서 금방 이해했다.
아이들의 사연 떠올리며 기도 또 기도-세월호 이후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다고 했잖아요. 세상으로 나온 구체적 계기가 있나요.=한 가지로 딱 잘라 정리할 순 없는데 제일 먼저는 누군가한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 내가 왜 바보처럼 누워서 이러고 있지,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있는데 안산에서 장례식장이 부족해 애들이 시화까지 왔다는 거예요. 기막혔어요. 그 소식을 들은 때가 비 오는 밤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얘들아 옷 입어’ 그러고 애들 셋을 데리고 시화병원으로 갔어요. 그게 세월호 사고 이후 첫 외출이었어요. 세월호 부모님들을 보면서 많이 배웠던 거 같아요. 그분들이 대처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KBS 갔다가 청운동에 가셨을 때 막 욕을 하다가도 영정 사진을 안고 우시면서 밤을 새우셨잖아요.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이게 파르르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정말 끝까지 놓지 않고 함께 모여야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때 이후로 저도 앞뒤 없는 세월호 화가 좀 누그러졌던 거 같아요. 그때 청운동에 계신 부모님들에게 도시락 뚝딱 만들어드리고, 커피 타드리고, 추울 때는 담요 드리고, 낮에 더울 땐 우산 갖다드리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저렇게 도움이 되는 거겠구나’ 하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제일 처음 했던 건 기도예요. 저는 천주교 신자지만 성당을 다니지 않은 어른들이나 아이들 모두 다 좋은 곳으로 가서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했어요. 구체적으론 한 아이 한 아이 이름을 보며 ‘뭘 좋아했던 아이인데 천국에 가서 그림 그리게 해주세요, 기타 칠 수 있게 해주세요’ 분향소에 갈 때마다 아이의 이름과 사연을 외워올 만큼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런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신이 아니겠구나 혼자 생각했다. 그렇게 기도한 김지희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어서 더 그랬다.
-지금 세월호 부모님들에게 제일 안타까운 게 뭔가요.=자식 크는 걸 못 보는 거겠죠. 내 자식이 예쁜 짓 하거나 바보짓 하거나, 화낼 때 화내고 웃을 때 웃고 같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거. 28살에 돌아가신 막내삼촌이 있어요. 이번에 할머니 짐을 정리해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건 다 버리시면서도 막내삼촌이 사준 낡은 시계와 재킷은 챙기시더라고요. 시계는 가죽이 닳을까봐 손수건에 이렇게 싸놓으셨어요. 20년이 넘었는데 못 잊으셨던 거예요. 할머니가 지금 86살이에요. 세월호 사건이 아니었으면 할머니가 막내삼촌을 그렇게 못 잊고 계신 것도 몰랐을 거예요. 그러니 그분들 어떡해요. 할머니랑 세월호 부모님들 얘기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봉사 나서며 어느 때보다 좋아진 몸 -그분들에게 뭘 해주고 싶으세요.=지금은 제가 아직 초등학생이 둘이나 있어서 그렇게 시간을 많이 못 내지만 애들이 크면 클수록 시간이 많아질 거잖아요. 그러면 바느질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그분들 곁에 같이 있어주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구체적으로 어떤 게 필요할진 모르지만 끝까지 함께하려고요. 그분들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모잖아요. 저도 아이 셋 있는 엄마인데 그걸 왜 모르겠어요.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한 맹서라는 생각에 내가 괜히 안도했다.
-암 투병 중이라면서요. 지금 몸 상태는 어떤 거예요.=2010년에 진단을 받았는데 항암치료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해서 식구들 설득해서 치료 안 받고 몇 년 동안 강원도 평창에 내려가 요양했어요. 지금은 남편 사업과 아이들 때문에 시화에서 살고 있어요. 시골에 살다 와서 그런지 소음도 그렇고 공기도 그렇고 몸이 안 좋아 칩거 상태였어요. 근데 세월호 일들을 하고 ‘이웃’에 오고 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왔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 몸이 좋아요.
-자기 몸에 대해 불안한 것은 없으세요.=별로 없어요. 우리 엄마가 안산에서도 오래 살고 수원에서도 오래 사업을 하셨는데 ‘수원에서 이렇게 멋진 여자는 처음 봤다’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분이셨어요. 근데 마흔에 저와 비슷한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 뒤에 막연하게 엄마 딸이니까 나도 비슷하게 아플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제가 무슨 병인 줄 알았을 때 외려 마음이 편했어요. ‘그래? 그럼 먹는 것도 그렇고 더 조심하면 되겠네’ 그러곤 병원에 발 딱 끊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 결심했어요. 1년 동안 애들도 신경 안 쓰고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지금 암이 다 나았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모르죠. 신경 안 써요. 감기에 걸리면 바로 병원에 가는데 다른 증상은 좋아진 게 많아서 안 가보고 있어요. 제가 지금 38살이에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거든요. 젊기도 하고 너무 아깝잖아요. 애들 기르는 거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누리다 가고 싶어요.
-세월호 이전의 김지희와 이후의 김지희는 다른가요.=예전이 그냥 제 안에 갇혀 있던 김지희였다면 지금은 공존의 의미를 알게 된 거 같아요. 세월호 이후 같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된 거죠. 예전엔 나 힘든 거 때문에 자식에게조차 의무적이었던 같아요. 지금은 사람이 보여요. 사람이 없으면 나도 없구나 하는. 옛날하곤 다른 세상인 느낌이에요. 애들도 많이 바뀐 엄마를 보게 된 거죠. 예전에는 말을 잘 안 하거나 필요한 걸 해주거나 이런 쪽이었다면 지금은 엄마가 밝아 보이고, 말도 더 잘 통한대요.
천천히 오래, 깊고 단단하게그의 말을 복기하며 ‘이웃’에 와서 자원봉사를 하고 물건을 보내고 후원금을 보낸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를 오래 들여다봤다. 설문정, 김지희, 박인숙, 신미영, 임정미, 권영숙, 김희경, 황선혜, 조미진…. 수백 명의 이.웃.치.유.자.들. ‘이웃’의 내부 방침은 ‘천천히 오래’다. 이웃치유자인 전국의 수많은 김지희들이 있는 한 이 거대한 슬픔과 고통은 단풍처럼 결국 바래고 깊어질 것이다, 반드시. 때맞춰 떠오른 동시 한 편.
“엄마와/ 고추를 따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 엄마는 발을 동동 굴렀다/ 장독들을 열어놓고 왔는데/ 큰일 났다고 했다/ 고추바구니 그대로 두고 집으로 달려오니// 어마나!/ 이웃집 눈먼 할매/ 우리 장독 뚜껑/ 모두 덮어놓았다”(임길택)
그런 이웃들 있으면 폭풍을 동반해도, 양동이로 쏟아붓는 소나기여도 괜찮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 녹취 강선일*‘이명수의 충분한 사람’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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