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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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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곰이로소이다

뇌성마비 장애인 축구팀 ‘곰두리’와 함께한 신철순 감독의 26년
“시설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었다”
등록 2013-12-28 13:57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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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자꾸만 움츠러드는 추운 겨울입니다. 옆자리를 돌아볼 마음조차 메말라버린 분주한 연말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뭔가 따뜻한 소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장애인들과 처음 만난 그날부터 26년 동안 한결같은 인연을 이어온 곰두리축구단 신철순(68) 감독을 만난 것도 이런 마음에서입니다. 신 감독은 1972년부터 축구 지도자로 활동해왔고, 1988년 서울 장애인올림픽부터 줄곧 장애인 국가대표 축구팀을 맡아왔습니다.

첫 장애인올림픽서 이룬 4강-특별한 만남에는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장애인 축구팀은 어떻게 맡게 됐나요.

서울 장애인올림픽대회 때 뇌성마비 장애인 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됐어요. 명색이 올림픽 개최국인데 국가대표팀을 안 내보낼 수는 없으니 저보고 팀을 꾸리라고 하더군요. 그때가 5월인데 그제야 전국 복지관을 돌며 뇌성마비 장애인 30명 가운데 11명을 선발해서 합숙훈련을 했죠. 축구 경기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인조잔디가 깔린 상무체육관에서 아주 힘겹게 합숙하며 매달렸어요. 그런데 우리가 4위를 했습니다.

-그럼 올림픽 4강 아닌가요.

그게 여섯 나라만 출전을 해서요. (웃음) 당시만 해도 유럽 4곳과 오스트레일리아, 이렇게만 장애인 축구 국가대표팀이 있었습니다. 4위를 하니까 정말 속이 쓰린 거예요. 동메달만 따도 우리 선수들이 연금을 받잖아요. 장애인들이라 보탬이 많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에 지금도 미련이 남아요.

-그래서 계속 장애인 축구를 맡으신 건가요.

올림픽이 끝난 뒤 해단식까지 다 했어요. 그런데 아쉽더라고요. 처음 차는 공이지만, 땀 뻘뻘 흘리며 연습하고 나니까 잘하는 거예요. 근데 이 애들이 다시 시설이나 집구석에 틀어박힐 생각을 하니까요. 선수들한테 꿈을 주고 싶었어요. 그 미련 때문에 “너희 다음 일요일 날 와라. 우리 같이 축구하자. 올래?” 했더니 다들 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집 밖으로 나온 애들과 축구하고 밥 먹고, 차비 쥐어줘 보내고…. 장애인체육회도 장애인 축구팀도 없던 때였죠.

-장애인 축구라는 인식부터 퍼뜨리신 거네요.

사회적인 관심도 없을 때였으니까요. 서울 장애인올림픽 마스코트를 따서 ‘곰두리축구단’이라고 이름짓고 계속 축구를 가르치다가 3년쯤 되니까 시합이라도 할 수 있어야겠다 싶어 3개 팀으로 만들어 곰두리축구대회를 연 거죠. 지금은 전국 14개 팀이 활동하는데, 올해로 23회가 되었습니다.

-감독님 덕분에 일본도 변화를 겪었다고 들었어요.

일본이 우리보다 10년 늦었죠. 곰두리축구단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장애체육 전문가인 후사노 교수가 방문했어요. 논문을 쓴다면서 선수들 달리는 거랑 뛰는 거 측정도 하고, 또 다음해에도 찾아왔기에 제가 “그러지 말고 교수님도 일본팀을 만들어서 오세요” 했더니 정말로 그 다음해에 팀을 만들어서 왔어요. 그 뒤 일본팀이 곰두리축구대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우리보다 더 활성화가 됐어요.

-일본에서 상도 받으셨다던데요.

‘다카마도 노미야상’이라고 문화나 체육 분야에서 한-일 교류에 힘쓴 사람한테 주는 상이라는데요. 2009년 일본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제가 수상자로 추천됐다고.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나는 해당 안 됩니다’ 이랬어요. 그런 큰 상은 장관이나 대사 정도 돼야 받는 거 같았거든요. (웃음)

축구하고, 밥 먹고, 차비 줘 보내고

곰두리축구단의 꾸준한 활동에 힘입어 뇌성마비장애인축구연맹이 2004년에, 장애인축구협회가 2007년에 설립되었습니다.

-곰두리축구단은 뇌성마비 장애 축구팀인데, 다른 장애를 가진 축구팀도 있나요.

네. 뇌성마비 축구팀이 먼저 생겼고 청각장애·발달장애·지적장애 축구팀이 생겼어요. 시각장애팀은 좀 특별하게 제작된 공을 가지고 경기를 하지만 역시 활발해요.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축구를 하는 거죠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은 아무래도 축구는 못하는 건가요.

힘들겠지만 못하지는 않아요. 우리나라에는 휠체어장애인 축구팀이 없지만 캐나다에는 수백 개 팀이 있고 일본에도 많아요. 또 하나는 앰퓨티(Amputee)라고 절단장애인들이 목발을 짚고 합니다. 한 달 전 일본에 가서 8개 팀이 시합하는 것을 봤어요. 일본에는 정신장애 축구팀도 있습니다. 정신분열이나 알코올중독, 우울증에 걸린 분들이 재활을 위해 뛰는 거예요. 국제적으로 아주 활성화돼 있습니다.

-장애인들도 그렇게 다양하게 축구를 즐기는 줄 몰랐어요.

내전이 많았던 국가, 나이지리아 같은 곳에서는 목발 짚고 한 발로 차면서 축구를 해요. 이번에 일본 가니까 전동휠체어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한국도 얼른 만들어서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축구라는 게 독특한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사실 88 올림픽 전에는 장애인이 바깥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거든요. 집에만 있던 사람도 일단 나와서 공을 뻥뻥 차다보면 막 자신감이 붙고 그러거든요. 고등학교 팀들과도 친선경기를 하는데 함께 어울려 뛰다보면 오히려 학생들이 우리 장애인 선수들로부터 많이 배웠다고 인사합니다. 학부모들도 고마워하고요.

-세계대회도 있나요.

우리는 1990년 제3회 대회부터 참가했어요. 지금은 30개국 넘게 국가대표팀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솔직히 우리가 상대가 안 돼요. 2003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꼴등하고 2009년 네덜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16개 참가국 중에서 16위를 했어요.

-왜 꼴찌밖에 안 되나요.

당할 수가 없어요. 체력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원까지 여러 가지로 열악하거든요. 네덜란드는 워낙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려니와 뇌성마비 축구를 왕실에서 지원합니다. 뇌성마비 축구선수가 일반 남자대표팀 훈련장을 같이 써요. 예산도 넉넉하죠. 이란·러시아·우크라이나같이 분쟁을 겪은 국가는 그 때문에 후천적 장애가 많아서인지 장애인 선수를 우대하는데, 우리는 어떨 거 같아요? 국가 차원의 지원이 격차가 참 큽니다.

일하는 장애인이 축구도 잘한다

이 말을 듣다보니 2002 월드컵의 영웅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축구 구장을 건립하겠다는 약속을 꾸준히 지켜 최근 11번째로 구장 건립 협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생각납니다. 비장애인 감독의 그와 같은 열정은 아마도 장애인을 바라보는 네덜란드 사회의 힘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곰두리축구단은 어디서 연습하세요.

여러 군데 옮겨다니죠. 제가 장애인축구학교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안정적으로 할 운동장이 없어서 떠돕니다. 첫째·셋쨋주 일요일은 은평구청의 배려로 구리구장에서 하고 둘쨋주는 숭실대학교에서, 넷쨋주는 갈 곳이 없다가 이번 가을부터 가락고등학교에서 도와줘 그곳에서 하고 있지요.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에서 장애인 선수들을 우선 배려해서 운동장을 배정한다든가 그런 지원이 없나요.

특별히 우선해서 배려해줘야 한다는 원칙이나 제도가 있지는 않아요. 개인적인 인연으로 부탁하고 그러는 거죠. 운동장이 많다고 하지만 주말에 조기축구회니 뭐니 많은 팀이 신청하다보니, 어떤 기준이 없으면 저희가 우선적으로 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선수들은 주로 어떤가요.

창단 때 대부분이 부모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은 부모가 없거나 맡기고는 찾지 않는 경우더라고요. 돈 한 푼 낼 수 없는 선수들 처지라 제가 축구공부터 간식, 차비까지 다 마련해야 했어요.

-그래도 세월이 26년이나 흘렀는데 좀 바뀌지 않았나요.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안타까운 게 장애인 등급 문제와 장애인에게 주는 지원금인데요. 장애인이 일자리를 얻으면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이 깎여요. 취직이 돼서 형편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되기도 해요. 그러니까 그냥 주는 거 받아 겨울 따뜻하게 나며 먹고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니 자기 삶을 설계하는 것, 그런 게 안 돼요. 생활인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해야 축구도 하는 건데 그게 안 되니까 그냥 다들 그렇게 지내는 거죠

-일을 해야 축구도 잘할 수 있다?

장애인에게도 일자리를 줘야 해요. 일본 장애인 선수들은 거의 다 일을 해요. 토요일에 와서 일요일에 하루 종일 게임하고 월요일 아침 비행기로 가요. 그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선수들 중에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반은 직업이 없고, 일자리가 있어도 그나마 단순노동이에요. 대회 때마다 국가대표로 40일 훈련을 해야 하는데, 직장 있는 선수는 그 시간을 할애받기도 힘들어요. 일반 체육인은 안 그렇잖아요. 격려금도 주고 학점도 다 주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고 회사 입장에서도 그럴 수 없는 거죠.

운동장 하나 예약하기 쉽지 않은 현실

이런 상황에서 축구팀의 재정을 26년이나 어떻게 꾸려갔을지 당연히 궁금해집니다.

-1990년대 초 아시아 대표팀 감독 이후로는 곰두리축구단 일만 하셨어요.

가족의 도움이 없었으면 유지가 안 됐죠. 처가 당시 학원강사를 했는데 그걸로 돈 벌어서 밥값 내주고 후원회도 꾸려주었어요. 제가 아는 인연으로 여기저기 부탁하고 많은 분들이 후원금도 내주시고 서예나 그림으로도 도와주었지만 후원 모금은 늘 어려워요. 사실 이 일 때문에 빚을 지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20년 넘게 해온 걸 딱 끊으면 지금 축구팀을 맡을 사람이 없어요.

한창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50대부터 경제적 수입이 없었고 오히려 돈을 썼던 가장이니 가족이 겪은 고초도 상당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다가 지치면 그만두는 게 속된 마음입니다.

-정말 오랫동안 하셨어요. 무엇이 감독님을 이끌었을까요.

운명인 것 같아요. 그때 그만두었으면 좋았겠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유명한 감독이라면 오히려 안 맡았을 텐데, 저는 그때 젊은 나이고 뭘 잘 몰랐으니까 그냥 맡았던 거죠. 하다보니까 내가 아니면 누구도 돌아보지 않더라고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면서 내가 끊을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했어요.

운명이다. 스스로 선택해서 개척해온 길에 대해 그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삶의 길에는 무엇이 어떻게 쌓여왔을까 싶습니다.

-마음에 남는 선수 하나를 꼽으라면요.

어릴 때 부모와 헤어져 시설에서 생활하다 10여 년 전부터 자립생활을 하는 친구가 있어요. 축구도 잘해서 주장도 맡고요. 2006년 KBS 스승의 날 특집 가족노래자랑에 함께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제가 이 방송에 나가서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면 좋겠다고, 이렇게 훌륭한 친구가 되었다고 했거든요. 시청자 투표에서 1위를 했지요. 노래 실력이 아니라 그 사연에 감동받아서요. (웃음) 그런데 연락은 없었어요. 연락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기쁜 일도 많고 힘든 기억도 많을 텐데 하나씩만 소개해주세요.

기쁜 일은 참 많았죠. 2002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것도 기뻤고, 2006 독일 월드컵 때는 26일간 11개국을 희망원정대로 순회하면서 교민들과 친선경기를 했어요. 알프스도 올라가고 우리나라 대표팀 응원도 하고요. 힘들었던 것은, 어떤 언론사에서 오보를 낸 적이 있어요. 제가 족벌로 축구단을 운영하면서 후원금을 착복하는 듯이 보도했어요. 언론중재위까지 가서 조정을 받기는 했지만, 그때는 정말 왜 이런 걸 했나 회의가 들었죠. 그때 너무 화가 나서 기자 멱살을 잡아야겠다 했는데, 알고 보니 그 기자가 장애인이어서 그만뒀지요. (웃음)

-장애인 스포츠가 오히려 스포츠의 본령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죠. 금메달 따야만 좋아하고 은메달 따면 우는데 스포츠가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장애인 스포츠는 재활스포츠로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선수 간 소통을 한다는 의미에서 더욱 그 방향으로 가야 해요. 그래서 이번 곰두리축구대회 때는 일부러 트로피를 없앴어요. 전부 1등이라는 거지요.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에 대해 한 말씀 해주세요.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어요. 차별하면 안 된다는 법도 있고 인권선언도 있죠, 그런데 축구로만 봐도 정작 활동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어려운 거예요. 이게 현실이에요. 아직도 차별적인 인식이나 장애등급제 등 벗어나야 할 게 많아요. 제가 애를 써서 후원을 받고 종교계나 학교, 심지어 사법연수원생들과 친선경기도 했지만 그게 다 일회성이에요. 여전히 운동장 하나 제대로 못 쓴다는 게 비극이에요.

장애인 축구단은 내 운명

저에게는 축구 하면 떠오르는 구호가 ‘꿈☆은 이루어진다’입니다. 한 가지 꿈을 놓고 묵묵히 걸어온 삶을 듣자니 하늘에서 반짝 빛나는 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70살을 눈앞에 둔 노감독에게 다시 꿈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앞으로 5~6년은 일선에서 제가 할 수 있지만, 세대 교체를 잘해서 사업비나 운영비가 연속적으로 보장되는 체제로 곰두리축구단을 만들어놓고 가려는데 쉽지는 않아요. 내년에는 아시안게임이 열리는데, 강호 이란이 있어서 은메달이라도 꼭 따야겠다고 목표를 정했어요. 2015년엔 미국에 가서 스포츠 외교뿐 아니라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보여주는 복지외교라는 것을 해보고 싶어요. 그게 꿈이에요.

정연순 변호사,녹취 전다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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