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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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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

1989 학력고사, 2013 수능에 부쳐
등록 2013-11-19 15:24 수정 2020-05-03 04:27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빨리!
말이 달린다. 뒤에는 구백구십구 마리의 말이 쫓고 있다. 앞에는 구백구십구 마리의 말이 앞서고 있다. 말의 뒷덜미 구백구십구 개의 시선이 꽂힌다. 말의 시선이 구백구십구 개의 뒷덜미에 꽂힌다.
빨리!

기다려 같이 가!
말이 외친다. 말의 외침이 구백구십구 개의 뒷덜미를 잡는다. 구백구십구 개의 외침이 말의 뒷덜미를 잡는다.
기다려 같이 가!

뭔가가 말의 옆구리를 찬다. 익숙한 통증이 뼈와 근육에 흐른다.
뛰어! 더 빨리!
앞발을 뻗는다. 허공을 내찬다. 발굽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들리는 건 원형 천막 가득한 숨소리뿐. 가쁜 숨소리뿐. 가쁜 숨. 거울과 전구로 치장된 천막 안을 말들이 내달린다. 거울 속 말들도 소리 없이 숨을 뿜는다. 점점 숨이 가빠져온다. 말은 여전히 황금기둥에 꿰어져 있다. 구백구십구 마리 말들도 황금기둥에 꿰어져 있다. 기둥 사이는 벌어지지도 않는다. 좁아지지도 않는다. 끝없이 제자리를 오르고 내려올 뿐.
이제 점점 힘에 부쳐온다. 꿰어져 있기도 버겁다.
뭔가가 말의 옆구리를 다시 찬다. 거울 속 말들이 거울 밖 말들을 걷어찬다.
앞발이 허공을 내찬다. 구백구십구 개의 앞발이 허공을 내찬다.
뛰어! 더 빨리!

운행이 종료되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요원이 안전띠를 풀 때까지….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천막 안을 가득 채웠던 숨소리가 사라진다. 말은 주위를 둘러본다. 풍경이 바뀐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발밑은 그대로다. 황금기둥이 박힌 바닥 틈새로 기계장치들이 보인다. 기계장치 떼가 기름에 번들거리며 우글거린다. 다시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곧 운행이 시작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요원의 지시대로 안전띠를….

천 마리 말이 돌고 있다.
천 개의 황금기둥이 오르내린다.
천 개의 안장이 오르내린다.
천 마리 말이 숨을 뱉는다.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멀어지지도 않는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다.

한동원 작가*‘한동원의 노 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한동원씨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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