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노들장애인야학에 처음 봉고차가 생기자, 그동안 혼자 이동할 수 없었던 중증장애인들의 입학이 이어졌다. 흔히 장애인의 삶을 비유하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나온 바로 그 수인(囚人)들이었다. 형기마저 없는 옥살이 20년, 30년 만에 첫 외출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교육 수준은 낮았다. 야학은 한글반을 만들고, 나는 그 반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여자친구가 필요하다’
어떤 이는 ‘손으로 쓰기’가 안 되었고, 어떤 이는 ‘소리 내어 읽기’가 안 되었다. 야학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집에 가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 숙제도 하기 어려웠다. 야학에서 가장 의욕 넘치는 교사들이 달라붙었는데도 1년이 지나도록 ‘가’에서 ‘하’까지를 도달하지 못했다. 몇 년을 씨름해야 겨우 유치원생 수준의 교육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속도가 더딘 것은 당연했다. 그 나이 되도록 외출 한번 못해본 사람들의 사회화 수준은 늘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주어도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몰라 기뻐하지 않았고, 목욕탕에 가면 정말 다 큰 사람들이 발가벗고 다니냐며 외국인처럼 물었다. 30년에 걸쳐 겪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니 극심한 성장통이 따랐고 교실은 짜증, 히스테리, 눈물 바람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속에서 J는 독보적으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남자 교사를 부를 때 외에는 누군가를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 J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있으면 글씨를 써 보였지만 쓸 수 있는 글자가 얼마 안 돼 대화는 스무고개 하듯 더 이어졌다. 내가 그의 마음을 알아맞히기 위해 질문을 하면 그는 ‘응’ ‘아니’로 답했다. 스무고개가 길어져서 내가 조금이라도 답답해하면 그는 이내 ‘미안’이라고 쓰며 대화를 중단했다. 오랜 세월 학습된 눈치가 지독했다.
그런 J는 종종 뜬금없이 ‘여자친구가 필요하다’거나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해서 교사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 눈빛이 절실하고 집요해서 대충 웃어넘길 수도 없었다.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상 J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그 사실을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은 자신이 ‘2년 안에 결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것을 교육의 기회로 삼아 ‘집과 야학 교실만 오가며 살아가는 중증장애인 J가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100가지쯤 늘어놓은 뒤 J가 야학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J는 너무 괴로워했다. 하지만 J는 그 뒤로도 계속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 말을 꺼냈다.
탈봉고 프로젝트 그리고 탈야학어느 날 술에 취한 J의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아들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진다는 긴 넋두리가 돌연 J와 결혼할 여자가 없느냐는 질문으로 꺾였을 때 나는 조금 어지러웠다. 서른이 넘은 아들을 여전히 강보에 싼 아기처럼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혼을 시키지 못해 애가 타는 부정(父情)이 잘 헤아려지지 않았다. 나는 다만 J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주기가 그의 아버지가 술에 취하는 주기일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다.
2009년 봄, 야학은 ‘탈-봉고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09년은 1999년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 서비스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탈-봉고 프로젝트는 학생들이 더 이상 봉고차에 기대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스스로 이동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학생들과 부모님들의 저항이 거셌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지하철을 타고, 주위 시선을 견디고, 눈과 비를 온전히 맞는 것은 여러모로 두려운 일이었다. 야학에서조차 버려졌다고 느끼는 듯 원망과 서러움을 쏟아냈다. J의 아버지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토록 힘들게 학교를 다니면서까지 늘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나는 금방 익숙해질 것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불능의 연쇄 속에서 “꼭 읽어주세요”그해 가을부터는 J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활동보조인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야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활동보조인이 잘 연결되지 않거나 날씨가 궂으면 결석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 새로운 도전에 제법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겨울이 다가오자 J의 아버지는 J가 감기에 잘 걸린다며 휴학을 하겠다고 알려왔다. 봄이 되어도 그는 복학을 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자우편이 왔을 뿐이다.
2013년 2월. J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스로 준비한 죽음이라고 했다. 그의 몸으로 그게 가능한가. 나는 죽었다는 사람이 정말 J일까 의심했다. 빈소를 찾아가니 국화꽃 속에서 웃는 사람은 내가 한글을 가르쳤던 J가 맞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답 없는 전자우편을 자꾸 보내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며 화를 냈다고 말하며 울었다. 집으로 돌아와 전자우편함에서 J의 이름을 검색했다. 첫 페이지에 뜬 편지들의 제목이 한결같았다. ‘꼭 읽어주세요.’ 그제야 나는 J에게 ‘죽을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전동휠체어가 고장이 났고, 계단 없는 새 집이 필요하고, 여자친구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답신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동휠체어는 신청 기간이 아니었고, 새 집이나 여자친구에 대해서도 긴 설명이 필요했으므로. 겨울도 지났으니 언제든 아쉬우면 다시 나오겠지, 수시로 드나드는 감옥이니 이번에도 무사히 나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사이에 아득한 절망으로 빠지는 크레바스가 있을 줄 몰랐다.
혼자서는 나갈 수 없는 3층 계단 집, 더 이상 아들을 업을 수 없는 늙은 아버지, 고장 난 전동휠체어, 잘 연결되지 않는 활동보조인, 더 이상 오지 않는 봉고, 대답 없는 사람들. 다시 계단, 늙은 아버지, 고장 난 휠체어…. 그 지독한 ‘불능’의 연쇄에 갇혀 J는 ‘폐만 끼치는 무능한’ 자신을 죽였다. 한 글자를 쓰기 위해 천천히 팔을 뻗어 손바닥 전체로 연필을 쥐고 안간힘을 쓰던 J. 개미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홀로 빈집에 갇혔을…세상이 좋아진 건 분명해 보였다. 그에게는 비록 고장이 났지만 전동휠체어도 있었고, 활동보조 서비스를 이용할 자격도 있었고, 지하철도 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괜찮아요, 안 죽어요, 하면서. 그러자 J는 1999년으로 돌아가 다시 집 안에 갇혔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타전을 보냈으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것마저 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방문을 걸어잠갔다.
그 밤, J가 죽었다.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을 힘을 다해 잡아당겼을 줄보다 가까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가 유서를 쓸 만큼 한글 실력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그래서 그가 표현할 수 없었던 절망이 슬프다. 내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잘 알아맞히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을 조금 넘었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사태’ 후 공연 요청 줄이어…“7월까지 ‘헤븐’ 투어”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 불러 대책 논의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대만 전자산업노조 “삼성 반도체 경쟁력 부족은 근로시간 아닌 기업무능 탓”
북 충돌 빌미로 계엄 노린 듯…노상원 수첩엔 ‘NLL서 공격 유도’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
세계서 가장 높이나는 새, ‘줄기러기’가 한국에 오다니
12월 24일 한겨레 그림판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