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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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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왜 떫은가

등록 2013-09-06 16:01 수정 2020-05-03 04:27

평소 시류에 편승해 대세에 영합한다는 신조를 굳건히 유지하는 필자, 처서도 지나 가을 냄새 제법 나기 시작하는 현 계절적 추세에 발맞춰, 이번엔 대표적 가을 아이템인 감에 대한 이야기.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주홍빛을 뿜는 감을 볼 때마다 항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감은 왜 떫은가?’ 감 마음이다. 뭐, 이리 답하신다면 더 이상 뭐라 드릴 말씀 없음이지만, 어쨌든 필자, 오랫동안 갈아왔던 칼을 뽑아 묵은 의문을 둘러싼 과학적 신비의 전모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상상보다 훨씬 깊은 모성이라는 것의 뿌리</font></font>

일단 ‘떫은맛’의 정체에서 시작하자. 떫은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혓바닥(즉, 미뢰)이 그 표면의 수분이 미세하게 마를 때 감지하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떫은맛이란 실제론 맛이 아니라 촉각인 것이다.
감에서 혓바닥의 수분을 흡수하는(즉, 떫은맛을 내는) 주요 성분은 ‘실리카데속시콜린산’이라는 물질로, 이 물질은 감이 익어감에 따라 껍질과 꼭지 그리고 씨 부위에 집중적으로 생성된다고 알려졌다. 그 이유는 감이 완전히 익어 충분히 싹을 틔울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에 새나 벌레에 의해 씨나 열매가 손상되거나 낙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니, 과연 우리가 모성이라 부르는 것의 뿌리는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깊은 것 같다.
아무튼 흔히 감을 많이 먹으면 변비에 걸리기 쉽다고들 하는데, 이는 결국 감에 함유된 실리카데속시콜린산의 수분 흡수 작용에 의한 대장 내 수분 감소에 의한 현상과 다름없으므로, 평소 배변과 관련된 이유로 감의 섭식을 기피해온 분들은 이제부터 껍질·꼭지·씨만 피해 감의 풍미를 맘껏 즐겨주시면 되겠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이 변비라는 대목에서 중요한 과학사적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때는 1964년. 주로 화학비료를 생산하던 영국의 한 화학회사 연구원이 평소 즐겨 먹던 감이 변비를 유발하는 이유를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찾던 끝에, 결국 감의 떫은 성분을 발견해 이를 분리추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회사 내로 퍼졌고 상업적 감각이 탁월하던 회사 사장은 이 성분을 고형화해 제습제로 만들어야겠다는, 실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뤄낸다. 그리하여 회사의 경영진과 연구진은 사운을 걸고 비밀리에 실리카데속시콜린산의 인공 합성 프로젝트를 진행해, 그 결과 1967년 마침내 연구진은 최초로 실리카데속시콜린산을 인공 합성해내는 데 성공한다. 회사는 특허출원과 동시에 이 성분을 ‘실리카겔’이라 명명하니, 이것이 오늘날 도시락용 김부터 신발 밑창에 이르기까지 어디서건 쓰이는 제습제 실리카겔의 탄생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감과 변비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고 그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든 한 연구원의 호기심과 열정에서 비롯됐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떫으면 국정원 가서 물어보시든가</font></font>

그리하여 3년여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혁명적 제습제 실리카겔을 담은 첫 봉투가 공장 라인을 타고 세상에 나오는 광경을 지켜보던 연구원과 사장. 이들은 감격에 젖은 채, 함께 펜을 들어 첫 봉투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선명히 아로새긴다.

‘이제까지의 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깡그리 몽땅 필자가 지어낸 구라였다’라고.

헐, 이게 대체 뭥미 싶으신가? 사기다 싶으신가? 그래도 할 수 없다. 필자, 이 칼럼 서두에서 증인선서 같은 거 전혀 한 바 없거든. 그럼 우리나라에선 웬만한 구라는 다 용서받을 수 있다더라고.

떫으면 국정원이나 경찰청에 가서 물어보시든가.

한동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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