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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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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죽여야 산다

등록 2013-08-21 14:11 수정 2020-05-03 04:27

살기 위해서 꼬리칸에서 앞칸으로 가야 했다. 어둡고 지저분한 꼬리칸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같기도 했고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의 삶 같기도 한, 그 꼬리칸에서 그들은 죽도록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욕망을 지배자들은 늘 확인시켜주었다. “I belong to front. You belong to tale.” 난 앞이고, 넌 뒤야.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상징으로 가득 찬, 설국열차의 질주는 그렇게 시작됐다. 한 달 동안 지내다 돌아온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는 지나치게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일까 의심스러운, 대나무가 얼기설기 엮인 집에서 젖 먹이는 여인을 발견했다. 오염된 식수로 인해 매년 몇천 명의 사람이 죽는다는 통계도 보았다. 그러나 얼마나 큰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저택을 소유한 사람도 꽤 있었다. 애완견을 돌보는 헬퍼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도 꼬리칸, 앞칸 사람들이 있다.

질서를 떠받치는 웅장한 엔진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을 선언한 지 20년이 되었다. 삼성은 자찬하기 바쁘다. 홈페이지에는 ‘세계 최고’ ‘한국 1등’ ‘창의 혁신’이 보인다. 낯부끄럽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윤리경영’ ‘환경보호’라는 단어도 보인다. 맙소사. 어쨌든 이건희 회장에게 지난 20년은 자신의 ‘마누라와 자식들 빼고 다 바뀐’ 20년이다. 그사이 삼성은 비슷한 체급의 기업들을 따돌렸다. 탈법, 부패를 뛰어넘는 돈의 힘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동료 기업인들이 감옥을 들락거리는 동안 전용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드나드는 여유도 생겼다. 가히 신경영 20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앞칸 중에서도 앞칸이다.

다시 설국열차. 앞칸에 도착한 혁명가가 본 것은 완고한 질서였다. 꼬리칸과 앞칸을 모두 관통하는 질서. 그는 결국 질서 앞에 무릎을 꿇는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터 베냐민의 말이 떠올랐다. 억압이 상례임을 깨닫고 역사 속에서 지금을 바라보지 못하면 진정한 비상사태가 도래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설국열차의 지배자는 당면한 억압적 상태는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고 사라질 계획도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모두가 함께 살길이라고 말한다. 혁명가는 질서를 떠받치는 웅장한 엔진 앞에 좌절한다. 앞칸의 실체였다.

꼬리칸만이 할 수 있는 일

영화 가 본론이 아니니 말하자면, 삼성 신경영 20년은 변화와 혁신으로 포장된 1등의 시간이었다.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질서가 확립된 시간이었다. 그들의 포장이 무엇이든 간에 윤리와 공존은 사라졌다.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 때문에 무기력할 뿐이지, 그들의 질서가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리는, 모두 잘 안다. 어느 나라의 극단적 빈곤과 이를 딛고 쌓인 부도 마찬가지다. “I belong to front. You belong to tale”이 견고하다. 그렇게 모두는 파국을 향해 달리는 설국열차에 올라탔다고 하면 과장일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현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인정도 물론 아니겠지만, 앞칸을 정복하는 일도 아닐 듯싶다. 필요한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닐까.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것은 열차가 아니라 질서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인간의 무리만이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다. 앞칸과 1등은 할 수 없는, 꼬리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질서를 죽이는 것이 생존을 위한 미션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래야, 질서가 죽는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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