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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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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만큼, 350원만큼 미안한 나라

등록 2013-07-09 17:40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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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지도 않던 ‘토스트를 팝니다’라는 글자가 보인 것은 배가 고파서였겠지. 차양막을 들추고 들어선 순간, 아차 싶었다. 토스트를 파는 할머니는 청결해 보이지 않았다. 1초를 100번 쪼갠 시간만큼 고민했다. 그냥 가버릴까. 그러나 뭘 줄까 물어보는 할머니 눈도 보고 말았으니, 대충 호박토스트 하나 주세요, 했다. 호박토스트를 내미는 할머니 손톱 밑에 때가 또 보였다. 얼마예요? 1500원이에요. 한마디 덧붙인다. 남는 게 없어 500원 올렸어요. “미안해요.” 아니 잘하셨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나왔다. 그날 하루 종일 미안해요 미안해요… 뒷말을 물고 다녔다. 할머니는 무엇이 미안했을까. 이윤을 더 남겨서 미안하다는 말이겠지. 내가 당신의 돈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하다는 말이겠지.

<font size="3">종일 머릿속을 맴돈 노점상 할머니의 한마디</font>

2011년 최저임금 4320원, 2012년 최저임금 4580원, 2013년 최저임금 4860원. 내년도 기껏 몇백원에 몇십전 더 붙은 금액이 최저임금이 되겠지. 그러나 본 적도 없는 최소 단위 몇십전에 벌벌 떨며 경제가 망한다고 떠드는 이들의 삶은 어떨까. 한 해 동안 5조원을 더 벌어 14조원을 재산으로 가진 이건희 회장은 어떨까. 삼성과 현대차는 회장과 아들들까지 세계 500대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데 어떨까. “미안해요.” 5조원을 더 벌어서 미안해요, 우리 가족만 부자가 되어서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들의 돈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해요, 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은 있을까.

전 국정원장을 비롯한 직원 70명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고,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불법 정치 개입을 가려주기 위해 일선 수사를 방해했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성 인권’ 운운하며 엉뚱하게 쟁점을 회피했다. 이제야 마침내 모두가 미안해야 할 시간인데, 난데없는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이 튀어나왔다. 미안함은 자취를 감추고 국경이 언론을 덮었다. 밀양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조사 활동을 모두 마쳤더니, 전쟁보다 깊은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주민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만든 누구도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하거나 치료해주지 않는다. 오늘도 경찰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누우면 불법집회, 향로를 피우면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노동자들을 땅바닥에 패대기친다. 그러나 그들 역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

<font size="2">상추에게 치커리에게 나는 미안하다</font>

봄부터 시작한 옥상 텃밭은 상추며 치커리, 쑥갓까지 끝물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파리 달기를 그만두기 위해 치커리와 쑥갓에 그렇게 예쁜 꽃이 피는 줄 처음 알았다. 더 이상 먹을 것은 없으니 내 모양새나 보라고 화들짝 핀 보라색 치커리꽃을 보면서 갑자기 미안해졌다. 내내 뜯어 먹으면서 물이나 제대로 줬던가 생각에 이르렀다. 남루하고 초라한 할머니의 행색 때문에 토스트조차 불결하다, 내치려 했던 마음이 겹쳤다. 누가 미안해야 했던 것일까. 아무도 미안하지 않은 나라에서 그날 할머니는 나에게, 나는 치커리에게 미안함을 바쳤다.

*글을 끝낸 오늘, 2014년 최저임금이 5210원으로 결정됐다. 7.2% 인상, 파격적인 인상. 우리는 딱 350원만큼 미안한 세상에 다시 살게 되었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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