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나 추석 때 TV쇼에서 남발되는 콘셉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필자는 개인적으로 ‘외국인이 한국을 봤을 때 가장 ○○한 것은?’ 같은 이야기를 꽤 좋아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공짜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항공료도 숙박료도 시차 적응도 없이 말이지. 아무튼.
엔딩 부분에서 은근스리슬슬
그런 카인드 오브 이야기들 중, 최근 들은 얘기는 이것이었다. ‘한국의 야구장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신기하고도 재밌는 것은?’ 힌트를 드리자면, 이 이야기를 한 외국인은 남성이었다. 그렇다면 뻔하다. 답은 당연히도 ‘치어리더의 존재’다. 아님 뭐겠어. 물론 그 뒤에 ‘세계 최대의 가라오케’니 ‘한국 특유의 독특한 집단응원 문화’니 하는 구차한 변명스런 기타 등등이 딸려나오긴 했지만, 됐고, 필자는 이미 십분 공감했다. 필자가 외국인이라도 한국에 와서 야구장을 들러볼 기특한 생각을 해낸 스스로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울 것 같다.
이와 좀 비슷한 버전이지만, 사뭇 다른 얘기가 또 하나 있다. ‘한국의 뉴스를 봤을 때 느꼈던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이 그것인데, 필자가 내놓은 답은 ‘먹을 거 관련 뉴스가 타국 뉴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뒤에 반드시 신종 다이어트 관련 정보가 따라붙는다’였지만, 이건 정답이 아니었다. 답은 훨씬 간단했다. ‘한국의 TV 뉴스에는 배경음악(BGM)이 깔린다’였던 것이다.
무슨 소린가? BGM이라니? 요즘 뉴스에선 백화점 매장처럼 청와대 관련 뉴스에 새마을 노래라도 깔고 들어간다는 얘긴가? 그런 게 아니고, 뉴스 말미 기자가 엔딩을 잡는 대목에서 갑자기 은근스리슬슬 깔려드는 음악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평생 노점으로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쾌척한 할머니’라든가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 바꾸기를 통한 이해와 용서’ 같은 뉴스를 생각해보자. 이런 뉴스의 말미에는 흔히 “각박한 세태에 잔잔한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라든가, “우리의 미래는 어둡지만은 않을 것입니다”라든가 하는 감동 압출용 KS 표준 멘트가 등장하는데, 맞다, 과연 그러했다. 이런 대목에서는 대개 기자의 장엄무쌍한 멘트에 걸맞은 장엄뮤직(<you raise me up>풍)이 깔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북한 미사일 또 실험’이라든가 ‘집중호우 엄청 피해’ 같은 세트 뉴스의 도입부 화면에서도 BGM이 깔리는데, 단지 액션영화의 나쁜 놈 출몰 장면이나 호러영화의 살인마 등장 장면에서나 쓰일 법한 음악이 나온다는 점만이 앞의 경우와 다르다. 어쨌든, 적어도 필자가 가본 나라들 중에서는 이런 식으로 뉴스에 BGM을 깔아넣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있나요?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뉴스에 나오는 음악이라면 오로지 광고가 나오기 직전과 직후의 시그널 뮤직이 전부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메시지 확정’
그렇다면 이런 음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물론 ‘이 뉴스를 보고는 이러한 감정을 느껴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빼도 박도 못하게 확정판결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 말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최소한 음악 정도는 깔아줘야만, 특정 사건에 대해 기자가 품고 있는 기분·입장·태도·감정(‘정보’가 절대 아니다)이 제대로 살아 생생히 전달되는 것이다. 뭐, 이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뉴스 마무리 멘트 대목마다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들어낸 저녁놀 물든 분홍빛 구름이라든가, 오색 태극무늬 창공에 수놓는 곡예비행단 같은 걸 볼 날도 멀지 않았다.
이 얘기를 한 그 외국인은 순진무구한 사슴 눈을 반짝이며 ‘한국에서는 뉴스의 객관성이나 중립성 같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생각했다. 겨우 BGM 나부랭이로? 필자는 그가 한국 TV 뉴스의 내용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초보임을 진정 다행스럽게 느꼈다.
한동원 작가
*작가 한동원씨가 ‘노 땡큐!’ 필진에 합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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