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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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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의 풍요, ‘사회’의 빈곤

등록 2013-06-04 09:56 수정 2020-05-03 04:27

요즘 가장 핫한 주제를 꼽는다면 협동조합도 아마 한 자리 꿰찰 게 틀림없다. 헌정 역사상 여야가 유례없이 초스피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는 소리를 듣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지 정확히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탄생한 협동조합만 1천개를 훌쩍 웃돈다. ‘협동조합 르네상스’란 얘기가 나도는 게 괜한 허풍이 아니다. 최근엔 한 인터넷 언론이 주식회사라는 낯익은 옷을 벗고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겠다고 결정해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다른 나라에서는 ‘협동조합 언론’ 사례가 꽤 있다).
협동조합 열기는 더욱 달아오를 전망이다. 임기 말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을 이끌어낸 탓에, 전임 이명박 정부를 두고선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시작해 ‘협동조합 프렌들리’로 끝맺음했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뒤늦게 나온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5년 동안 협동조합 수를 지금보다 1만 개가량 더 늘릴 태세다. 진보와 보수 쪽에서 한목소리로 협동조합 찬가가 울려나오는 것도 이채롭다.
이런 까닭에 한쪽에선 ‘협동조합 거품론’마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느닷없이(!) 협동조합이 대세가 된 현실을 두고, 전체 경제 시스템 가운데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는 협동조합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있다거나, 응당 국가가 떠안아야 할 짐을 민간에 떠넘기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우려를 쏟아낸다. 마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짓밟힌 자존심이 2000년대 초반 벤처 대망론으로 성급히 피어올랐다가 한순간에 사그라졌듯이, 지금의 협동조합 열기도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오랜 염증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과대포장된 데 따른 결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협동조합의 싹을 더욱 북돋워줘야 한다는 진지한 재반론도 이어진다.
정작 중요한 건 지금의 협동조합 열기가 거품이냐 아니냐, 협동조합 대세론이 옳으냐 그르냐를 가려내는 일이 아니다. 경쟁보다는 협력에, 나보다는 우리에 방점을 찍는다는 협동조합이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대안, 아니면 적어도 불완전한 시장에 대한 치료제 임무를 해내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특히 우리에게 그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일이다. 일종의 ‘협동조합 발생학’이라고나 할까. 우리보다 앞서 협동조합의 싹을 틔운 나라들이 걸어온 역사는, 시장경제가 일단 사회 전 영역을 뚫고 들어간 뒤 그 대안 혹은 치료제로 협동조합이 등장한 게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크고 작은 협동조합운동은 오히려 애초부터 시장이 온전히 뚫고 들어가지 못한, ‘마지막 공간’을 근거지 삼아 힘을 키워왔다. 시장경제와 협동조합의 선후관계가 정반대라는 얘기다. 협동조합운동의 주된 동력이, 시장경제 논리에 완전히 포섭된 채 그 폭력성에 지칠 대로 지친 하위계층(임노동자)보다는, 애초부터 시장경제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전(前)자본주의적 수공업자(중간계층)들에서 발견되는건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시장의 공격을 올곧이 버텨내는 그 마지막 공간, 튼튼한 요새가 바로 ‘사회’(the social)다. 사회를 지켜내고 확대할 때만, 비로소 대안의 가능성도, 치료제의 희망도 열리는 셈이다.
아쉽게도, 우리에게 ‘사회’란 극히 미약한 존재, 한 뼘도 채 되지 못하는 초라한 공간일 뿐인 듯 보인다. 5·18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극우세력의 준동, 최근 불거진 통상임금 논란을 단순히 경쟁력과 효율성의 잣대로 들여다보는 조급함 등은 모두 사회결핍증이 가져온 병리 현상에 가깝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시장경제가 차근차근 자리잡은 서구 나라들과 달리, 식민지와 분단, 전쟁을 거치며 아무런 완충장치 없는 백지 공간에 시장경제 시스템만 초단기 숙성시킨 역사적 경험도 한몫했을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소셜마케팅, 소셜펀딩… 너도나도 ‘소셜’만을 외치는 소셜 천국의 나라에서, 정작 ‘사회’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다가오는 아이러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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