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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중국의 꿈’

등록 2013-01-26 15:55 수정 2020-05-03 04:27

꿈은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꿈이 없다면 비루한 현실도 바뀌지 않는다. 누구나 아는 얘기다. 문제는 서로 다른 꿈이 다툴 때다. 연초부터 세계인의 이목을 끈 중국의 대표적 진보 언론 에 대한 검열, 이에 맞선 기자들의 파업, 시민들의 찬반 시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전말은 이렇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인 광둥성 광저우에 사옥을 둔 주간 이 1월3일치 신년 기획으로 준비한 ‘중국의 꿈, 헌정의 꿈’이 광둥성 당 선전부장 퉈전이 썼다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꿈에 다가가 있다’는 기사로 바뀌었다. 기자들이 파업에 나서자,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3200만의 팔로어를 지닌 여배우 야오천, 미국 시사주간 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8위로 꼽은 작가 겸 블로거 한한 등 젊은 유명 인사를 비롯한 시민들의 지지가 이어졌다. 은 매주 120만 부를 발행하며, 주 독자층은 지식인이다. 사태가 커지자 중국 6세대 리더로 꼽히는 후춘화 광둥성 당서기가 나서 성 선전부의 검열을 의견 개진으로 바꾸고, 파업 기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대신 총편집(편집국장)이 물러나는 선에서 절충했다. 은 1월10일치를 정상 발행했다.
사실 논란의 발단은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 당 총서기의 발언이었다. 시진핑은 지난해 11월29일 ‘중국의 꿈’을 새 화두로 제시한 데 이어, 12월4일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이나 법률을 초월한 특권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문제가 된 신년 기획은 그에 대한 식 화답이었다. ‘중국의 꿈’을 이루려면 법치를 바로 세워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퉈전 선전부장 등 주류 세력은 ‘중국의 꿈’을 조기에 이루려면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해야 한다는 쪽이다. 상황을 섬세하게 보려면, 사옥 앞에 파업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오성홍기와 마오쩌둥 초상화를 흔들며 “의 꿈은 미국의 꿈이다. 매국노 신문을 끝장내자”고 외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보시라이 사태 뒤 언론 탄압을 당하고 있다며 평등과 국가의 시장 통제를 주장한 ‘신좌파’ 시위대가 한켠을 차지했다는 사실도.
이렇듯 중화민족의 부흥을 실현할 ‘중국의 꿈’은 갈라져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성장을 앞세운 ‘부국의 꿈’, 국가의 시장 통제를 통한 ‘평등의 꿈’, 인권과 자유를 앞세운 ‘민주의 꿈’이 각축한다.
균열 이전 ‘중국의 꿈’은 어땠을까? 1월12일 장쑤성 쑤저우의 린자오 묘 앞에서 지지 시위가 벌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린자오가 누구인가? 1957년 베이징대학의 ‘5·19 사회주의 민주운동’의 주역으로 ‘우파’로 몰려 1968년 4월29일 총살된 ‘중국 민주화운동의 성녀’다(중국 당국은 총살 집행 이틀 뒤 린자오의 어머니를 찾아와 총알값을 달라고 했단다). 린자오는 오랜 옥살이 와중에 “후대인들이 과거 어느 시기를 연구하는 데 몇몇 방증 자료를 제공하고자” 머리핀으로 자신의 피를 찍어 18만 자에 이르는 ‘피로 쓴 증언’을 남겼다. 그는 “내게 자유와 인권을 돌려달라”고 외쳤지만, 중국 공산혁명의 딸답게 서구식 민주주의자와는 결이 달랐다. 그는 “우리는 어쨌거나 모두 중국 사람”이라며 자신의 사상 원칙으로 ‘자유만세’와 함께 ‘조국지상’을 강조했다. 린자오와 ‘5·19 운동’ 동료들은 ‘사회주의 공유제’와 ‘사회주의 민주’가 결합된 중국 혁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꿈’의 원형질은 진압됐다. 중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첸리췬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1957년이라는 벼리를 틀어쥐어야 한다”고 말한 까닭이다.
서로 다른 ‘중국의 꿈’이 각축하는 와중에 시진핑은 “국가가 좋아야 민족도 좋고, 모두에게 좋다”며 ‘집단’에 방점을 찍었다. 그 곁에는, “이번에는 내가 졌지만,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한 무덤 속의 린자오를 불러낸 2013년 중국인이 있다. 중국의 길은 깊고 복잡하다.
*참고 문헌: (첸리췬 지음·그린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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